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7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피해야 할 '현세적인 것들' 목록

불륜은 올바른 배우자를 두고 다른 이와 놀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물론 부부 사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지만 실질적인 불륜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충실한 배우자이신 하느님을 두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영역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에 불륜이 저질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죄는 불륜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다른 것과 놀아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은 육체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더러워져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더러움은 영혼에서 일어납니다. 영혼은 '죄'로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이 더러움을 느낍니다. 그것을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길을 걷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죄스러움에 빠져들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이미 느끼게 됩니다. 물론 사람이 오랫동안 더러운 환경에서 살면 그곳에 익숙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오랫동안 더러워져 있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느끼기를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그들은 자신의 더러움을 대신해 줄 헛된 향수를 찾습니다. 그 향수는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면서 더욱 더러움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이미 영혼에서 냄새가 나는 데 정작 자신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쁜 욕망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욕망' 자체가 죄가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가 있는 욕망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욕망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도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온갖 세속 욕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영혼은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욕망은 영혼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핸들입니다. 엔진이 좋은 차가 상가로 돌진하면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듯이 강한 욕망에 그릇된 방향이 설정되면 자기 자신을 비롯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됩니다. 탐욕은 필요 이상의 것을 과하게 욕

초주검이 된 영혼

율법 교사의 의도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더 능력있는 이가 덜 능력있는 이의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상대가 그만한 실력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헌데 지금 한낱 교만에 사로잡힌 이가 하느님의 외아들을 시험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비유 앞에서 말문이 막히게 된 율법 교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율법 교사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와 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즉, 내가 가진 합리적 사고에 하느님이 들어오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일쑤입니다. 나는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런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느님은 과연 그렇게 '실천'하시는지 시험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한 결과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 다루듯 하고 실망하고 맙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정당하다고 우겨대고 싶어합니다. 비슷한 인물로 '욥'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억울함에 대해서 하느님이 동조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욥 앞에서 당신의 무한한 권능을 드러낼 뿐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 안에서 오직 정의로운 분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 앞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정당하고자 한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수용하고 실천할 때에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강도 당한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골목골목을 찾아 다니면서 이 강도 당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도 당한 사람을 이웃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만한 확률로 일어날까요?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처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