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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부유함을 함께 나누다

부유함의 영역에는 여러가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기본은 '돈'입니다. 돈이 많은 것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름을 품지 않은 부는 죄가 됩니다. 즉 자신이 가진 그 많은 것을 올바른 목적에 사용하려는 의지 없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무턱대고 모으기만 하고 다른 이 앞에 으스대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돈벌이는 커녕  그러나 사람이 돈으로만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양한 것으로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식도 가질 수 있고 재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죄스런 부유함'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지닌 것으로 '교만'을 형성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남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부족하게 아는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은 영적 교만이 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유명 연예인이 되어서 자신을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색다른 '부유함'에 대해서 묵상하게 이끕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부유함입니다. 즉 자신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하느님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 그런 신앙의 기쁨을 타인과 나누지 않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영역을 오직 자신들의 놀이터로만 만들기 시작하는 이들입니다. 사실상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늘 해 오던 일상의 습관의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의 정신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이들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합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하느님은 결코 우리 자신만을 위한 신앙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외아들을

의인

의인이 의인인 이유는 자신에게 잘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리한 선택보다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돈 많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힘 있는 이들에게 굽신거리면서 나의 안락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영리한 선택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만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것은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여도 하느님 앞에서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의인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게 운명지워져 있다. 고통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의인들은 그 모든 면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가난함도 견뎌야 하고 외로움도 이겨내야 하며 영적으로도 버림받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단련이야말로 그들의 내면의 보석을 진정으로 빛내게 된다. 의인들이 기다리는 영광은 지상의 영광이 아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취직자리를 얻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결국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릴 것들이다. 그래서 의인은 영원한 영광을 기대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영광은 영원하신 분과의 만남의 순간에 온전하게 얻게 되는 것이다. 의인들은 오직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의로움에 마음을 둔 이에게 세상은 그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 겉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속에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내면을 보게 되면 의인은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더욱 더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리라 하는 희망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바로 곁을 지나쳐가는 구세주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기회를 상실하고 자신이 가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어둠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의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고, 나아가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력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자신을 버리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저 자신을 막 대하고 소홀히 여기고 자신의 모든 욕구를 없애버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그저 나 자신을 없는 것 취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바로 버리려면 그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엄마가 책상을 치우라고 합니다. 그 말이 책상에 있는 모든 기자재를 싹 다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고 먼지를 닦으라는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자신을 버린다는 말도 보다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에서 우리를 이끄는 힘은 바로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입니다. 인간은 욕구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욕구가 없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뿐입니다.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무언가를 이루거나 성취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그저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생이 다하기를 기다릴 뿐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 욕구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우리의 이 욕구가 누구 때문에 형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에서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의 욕구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되고, 반면 우리의 욕구가 내가 아닌 존재에서 얻어진 것이라면 나는 비로소 나를 버린 사람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 2,20) 성모님도 당신을 버리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고백을 통해 성모님은 당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성령으로

바쁨을 찬양하는 시대

우리는 바쁨을 자랑합니다.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여줘야 마치 나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의지대로 시간을 배분할 뿐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환경에서 미친듯이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유롭고 한가한 사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속의 가치를 위해서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저마다의 밭에 뿌리고 거기에서 열매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게임을 한다고 정신없이 바쁘다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피식 비웃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일에 지나치게 헌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의 생을 두고 지나가고 나면 그닥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일에 헌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칠일째 날에 거룩한 휴식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은 결국 영혼을 갉아먹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으며 나의 걸음은 올바른가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정처없이 달리다가 큰 사고가 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를 때에 바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고 그분이 부르실 때에 ‘네’ 하고 응답할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우리 가까이 다가온 구원의 기회를 잃게 될까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