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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죽마고우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조금 가까워지나 싶으면 휙 이사를 가버리게 되고 결국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환경이 오히려 다른 시선을 갖게 도와 주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사귀는 친구는 없지만 언제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친한 사람은 단순히 같은 공간을 오래도록 함께 공유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진짜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을 만나더라도 그와 나의 영혼의 지향점이 같다면 우리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오래 살아왔지만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주변에서 쉽게 관찰됩니다. 당장 이곳의 모습만 보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서 사람들을 연합했다가 갈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과거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친했던 이들이 어느샌가 마음이 갈라져 반목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흔합니다. 그래서 '친교'라는 의미를 새롭게 정돈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친교는 세상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목적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목적지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친하고자 한다면 다음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가? 2. 그 목적은 변함없는 것인가?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이런 질문에 부합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신앙이 우리를 진정한 친교로 이끌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올바른 가르침을 전제로 합니다.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내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와 그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의 목표가 전혀 딴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측은 부자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하고 다른 측은 가난한 이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한다면 언뜻 비

저주 아래 있는 이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갈라 3,10) 법은 어기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길 때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줍니다. 무언가를 잘한다고 법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교통 신호를 잘 지켰다고 경찰이 와서 상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도를 어기거나 차선을 어기면 와서 딱지를 끊어줍니다. 사제가 평일까지 열심히 강론을 열심히 준비한다고 교구에서 상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주일과 의무 축일에' 강론을 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교회법적 근거를 따라서 사제를 교구에 고발할 수 있습니다.  교회법 767조 2항 회중과 함께 거행하는 주일과 의무 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강론을 하여야 하며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이를 궐(생략)할 수 없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죄를 짓는 이들, 혹은 짓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죄를 짓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기 위해서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이들은 그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위를 수정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런 법을 살펴보는 이들도 다른 이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이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율법 시대 못지 않은 수많은 규정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로 지금까지 해 온 바 그대로 따라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형성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끔씩 놀라는 건, 어르신들이 빈 땅을 하나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고추를 심을지 깨를 심을지, 야채를 심을지 잘 알아서 어떻게든 놀리는 땅이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영혼의 텃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