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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내면과 외면

병원에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술을 지나치게 먹어 간이 아프다고 합니다. 의사는 약물 처방을 하고 다음 약속을 잡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그 사람이 돌아옵니다. 헌데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 증상에 이 약이면 일주일이면 낫고도 충분한 시간인데 왜 낫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검사를 시작합니다. 엑스레이며 CT 촬영이며 MRI까지 찍게 합니다. 피도 뽑고 초음파도 찍어 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그 어디에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제서야 의사는 감을 잡습니다. 문제는 그의 몸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영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이유는 '선'과 '악'으로 양분됩니다. 선을 추구하면서 세상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에 기대서 세상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면은 흔히 감추어지고 우리는 외견으로 평가 받습니다. 더러운 거래를 마주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세속적으로 힘있으면서 영적으로 타락한 행위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서로간의 담합이나 비밀스런 협약과 거래 속에서 힘없는 이들은 고통 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의 내면이 얼마나 더러워져 있는지를 알고 그들의 훗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안다면 그들에게 분노하기보다 차라리 연민을 품는 것이 더 나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내적인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결과를 바라보는 부모는 그것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자녀로 인해서 '자랑거리'가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만 들어간다면 누구를 어떻게 짓밟든 누구에게 청탁을 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타락한 세상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순수합니다. 영혼이 맑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안에서 천덕꾸러기

로마서의 조심해야 할 행동들

흥청대는 술잔치(진탕 먹고 마시기, 포식) orgies, banquetes 악마는 사람을 바로 악으로 이끌어 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처음에는 좋아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이끌어서 최종적으로 그 사람을 타락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하는 연회, 잔치는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잔치들 가운데에는 본질적인 친교를 도외시한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임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로마 시대에는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온갖 쾌락적 요소가 난무하는 연회가 벌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추잡한 연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1차로 끝나지 않는 잔치를 이어가면서 자신의 죄스런 갈증을 채워 나갑니다.  만취(취함, 폭음) drunkenness, borracheras 술이라는 것은 '흥겨움'을 불러오는 음식이자 기호식품입니다. 하지만 취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술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에 그 술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의 술 문화는 말 그대로 취하기 위한 목적의 음료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소비합니다. 그래서 더 빨리 취기를 느끼는 것 외에는 달리 술 그 자체가 고유하게 지닌 음식으로서의 가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취함은 언제나 우리를 올바른 사고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또 영적으로도 죄스러운 쾌락을 찾도록 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취기는 언제나 영적인 타락과 이어져 있습니다. 음탕(음행)promiscuity, lujuria 우리의 성적 욕구는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그리고 자녀의 출산으로 이어질 때에는 하느님의 축복된 도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을 쾌락 그 자체로만 이용하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심각하게 타락시킵니다. 우리가 성의 고유한 역할과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곧잘 성은 쾌락의 도구로만 이용되고 또 그 쾌락은 강렬하기 때문에 수

교회를 세우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마음 속에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무너져 가는 교회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돌들을 모아 작은 경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목소리의 의미는 물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영적인 교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는 내면의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의 눈이 감겨 있을 때는 엉뚱한 일을 두고 그것이 좋은 일인 양 매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무렵만 하더라도 좋은 신학생이 된다는 것은 마치 술을 잔뜩 많이 마시고도 취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잘 버티는 신학생이 좋은 신학생이라는 분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오죽하면 소주 한 잔 못 걸치고 고스톱 칠 줄 모르고 개고기 먹을 줄 모르면 신부가 아니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소위 술사목이라는 것이 활개를 치던 때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대기만하면 그 교회는 성장 하는 것이고 본당의 재정 규모가 커지고 흥청망청 원하는 대로 돈을 지출 할 수 있으면 좋은 교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는 그렇게 성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문턱이 닳도록 교회를 드나 들었고 새로 지어지는 본당의 숫자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기성세대 신앙 생활을 바라본 자녀들은 교회의 영적 가치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실망 해 버린 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는 짠맛을 잃게 되었고 아무 짝에 소용없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에 돈만 생각하는 상인들이 가득하고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교회 한해가 다시 밝았습니다. 저 멀리서 주님의 빛이 새롭게 비추어 옵니다. 이제 우리의 감겨져 있던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 바라시는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살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