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2월, 2022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을 시험하다

시험은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실행하는 것입니다.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높은 위치의 이들을 시험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입니다. 유치원생이 대학생의 학력을 시험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반대로 대학생은 유치원생이 얼마나 성장해 있는지 언제든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맞는데 하느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모든 것이 바로잡혀야 하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우리의 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서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하고 손은 손의 역할을 발은 발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약한 부위일수록 더욱 조심히 다루고 강한 부위는 밖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 어느 부위든지 심각한 상처가 나면 다른 일을 다 멈추고 그 곳을 먼저 추스르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일을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지구는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많은 것들을 무너뜨려 놓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멈출 줄 모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그런 영적 사정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마리아의 사건을 알면서 '남몰래 조용히 파혼'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파혼은 필요한 조치였지만 마리아가 사람들의 시선에 뭇매를 맞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요셉의 마음을 알고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바로잡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미흡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고 시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시험

거룩한 이성

사실 신앙은 '비이성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반이성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이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 이성에 반대로 행동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다만 그 이성을 '신앙'의 범주 안에서 활용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십자가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범주 안에서는 십자가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 맞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 행위에 대해서 내가 그 책임을 안는다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는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가 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영원의 가치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십자가의 고통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별하는 기준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을 지닌 이라면 십자가의 내적 가치를 깨닫고 힘들지만 그 십자가를 감내하고자 애를 쓸 것이고 신앙을 지닌 흉내를 내는 사람, 즉 거짓 신앙인이라면 합리적인 세속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십자가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자녀들은 언뜻 신심있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마다의 세속적 계산이 다 들어가 있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지독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속의 영은 거룩한 영, 즉 성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두고 사고를 전개해 나가는 영원한 생명에 속한 이들의 삶은 불가해한 것일 뿐입니다. 신앙의 어른들이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내 보속이다'라는 삶의 태도는 이성적인 이들에게는 거슬리는 말일 뿐입니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보속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녀들은 세상의 어두움을 함께 끌어안고 보속하듯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거

무조건 용서하는 하느님?

교회가 올바른 표지판이라면 사람들에게 다가올 일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그저 헛된 위안이나 위로로 감싸는 것은 답이 아니다. 특히나 오늘날은 하느님에 대한 그저 막연하고 푸근하기만 한 이미지가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실제로 들은 한 사람의 말은 이러했다. "하느님은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이잖아?" 틀렸다. 하느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뉘우치는 이를 용서하시는 분이다. 아무런 뉘우침도 회개도 없는데 그가 한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그 잘못의 피해자가 되는 이에게는 계속 그 피해를 당하고 있으라는 선포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정의는 온데간데 없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어떠한 불의도 훗날 교정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영혼까지 파멸시킬 수 있는 분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지녀야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교회는 이 힘을 상실해 버린 것 같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해서 인원이 빠져나가고 교회의 세속적 힘이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그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분 정도로 소개하고 말아 버린다. 이는 강자의 복음이 되고 만다.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짖밟으면서도 영원 안에서도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거짓 복음인 셈이다. 참된 복음은 우리를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서게 도와준다. 그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의 삶을 바로잡도록 도와준다. 복음은 나약하지 않다. 복음은 짠 맛이며 힘이 있다.

고상한 신학?

내가 신학생 때에 나는 신학자들이 정말 현명하고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현란한 수식어와 고급진 단어들로 가득한 신학 서적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런 책을 쓰는 사람들은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정말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자신이 배운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저 어렵디 어려운 단어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은 때로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문의 커튼 뒤로 비겁하게 숨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신학자들이라는 사람이 순수하게 연구하는 분야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범주가 전혀 다르게 놀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리를 공부한다고 윤리적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영성을 공부한다고 영성적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더 거룩해 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론이라는 것이 적지 않은 경우에 '가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일 이러이러 하다면 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지적 놀이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때로는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는 것도 알았다. 신앙은 이성과 함께 어울려야 하지만 이성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 신앙 안에는 초월적인 영역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우리의 이성의 범주를 월등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성은 신학에 충실히 봉사하는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칫 교만해진 이성은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고 산산조각난 신앙의 파편들은 그 원초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해하고 책을 쓰기 위해서 신앙을 지니는 게 아니라 그 신앙을 구체화하고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