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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세상

세상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과학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정확성은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이루어져가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외부적 질서는 과학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그것을 움직이는 힘은 내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내부의 힘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기인하고 그 욕구들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사실 '혼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대상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혼돈의 세상 가운데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이 강조하는 질서의 밑바탕이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세상의 이유 속에서 다른 가치들은 모두 무의미하게 변해 버립니다. 세상은 그것을 질서라고 여기고 그 질서를 바탕으로 보다 더 잘 먹고 사는 것을 가장 근원적인 가치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헌데 신앙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엉뚱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코린토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코린 5,15)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 지금껏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신앙은 우리에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무엇을 위해서 살라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진리가 도리어 혼돈처럼 느껴집니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무엇이 혼돈이고 무엇이 질서일까요? 체계적

진정한 질서

성경 속에서 곧잘 물이라는 것은 '혼돈'이나 '혼란'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영성적인 면에서 물은 곧 세상의 혼잡한 정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그 세속이라는 물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곧 영혼의 죽음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바다라는 '죽음'을 앞에 두고 하느님의 보호 속에서 그것을 당당하게 뚫고 지나갑니다. 하느님은 그런 혼란함 속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질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집니다. '구름'이라는 것, '먹구름'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비정형'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름을 어떻게 도구처럼 다룰 수 있을까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구름이 옷처럼, 먹구름이 포대기처럼 간주됩니다. 혼돈이 가득한 가운데 하느님은 그 모든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관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속성은 우리의 '신앙'이라는 질서를 망가뜨리려 합니다. 이 혼잡한 세상 속에서 결국 세속의 강한 힘에 기대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우리를 더한 혼란으로 밀어넣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혼돈의 힘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혼돈일 뿐입니다. 강한 파도는 커다란 배를 순식간에 파괴해 버릴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 역시도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혼돈의 결과일 뿐입니다. 참된 질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올바른 경계를 아시고 그것이 멈추어야 할 때를 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가 진정한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참된 질서는 인간에게 '안정'을 허락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지상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박해를 당해도 결국 그 내면에 '평화'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런 그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세상의 힘은 아무리 겉꾸민 평화를 드러내고자 해도 결국 그 내면에

영혼의 능동성

영혼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영혼은 능동적입니다. 영혼은 그 능동성의 바탕이 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를 바탕으로 주변을 관찰하고 식별하며 수용하고 판단하고 실행합니다.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를 상상해 봅시다. 땅에 떨어진 반짝거리는 물건을 보았을 때에 그 아이는 사탕인가 싶어 쪼르르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탕이 아니라 다른 돌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는 실망하고 그것을 내팽개치고 다시 가던 길을 갑니다. 그 아이의 내면 속에 사탕을 향한 갈망이 그 아이의 행동을 좌우한 셈입니다. 만일 수석을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는 주변의 돌들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방금 아이가 내버리고 간 돌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 안에 새겨져 있는 무늬의 독특함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돌을 보석처럼 지니고 가서 가장 고귀한 곳에 잘 장식해 둡니다. 그의 내면에 존재하던 돌에 대한 의지가 그의 행동의 세밀한 부분을 결정한 셈입니다. 우리의 눈은 ‘감각기관’을 대변하며 영혼이 들고가서 요리할 것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헌데 눈은 순진하게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안에 선재하는 요소를 바탕으로 시선을 둡니다. 그래서 눈이 등불이 됩니다. 나의 눈을 어디로 향할 것이며 무엇을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가져와 식별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그 영혼 안에 ‘어둠’이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둠으로 가득한 영혼은 주변에서 자신의 어둠의 욕구를 채울 것들을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는 더 큰 어둠을 끌어 들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험담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의 주변에 그런 요소를 전해주는 이들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들인 부정적인 요소는 그를 더욱 어두운 의지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