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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 1일 주일 [(백) 모든 성인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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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몰락》의 논리적 문답과 의지의 메커니즘

  《악마의 몰락》의 논리적 문답과 의지의 메커니즘 안셀무스의 《악마의 몰락》(라틴어 De casu diaboli )은 제목과 달리 악마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의 문답으로 “악한 의지가 어떻게 생겼는가?”, “모든 존재를 선하게 창조한 하느님이 악의 원인인가?”, “악마는 왜 책임을 지는가?”를 차례로 따지는 철학적 대화입니다. 전체 28장은 신의 창조와 선의 성격에서 출발해, 의지·정의·악의 관계, 타락한 천사의 책임과 지식 문제로 나아갑니다. 라틴어 원문과 장별 목차 먼저 용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rectitudo 는 ‘바름’ 또는 ‘올바름’, iustitia 는 정의·의로움, commodum 은 유익하거나 좋은 것, beatitudo 는 행복을 뜻합니다. 안셀무스에게 정의란 단지 규칙에 맞는 행동이 아니라 의지가 마땅히 향해야 할 바름을 그 바름 자체를 위해 지키는 것 입니다. 이 기준은 《진리에 관하여》의 논의를 배경으로 합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 안셀무스 1. 문답의 출발점: 선한 것의 근원은 하느님인가 1장은 “네가 가진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성서 구절을 천사에게도 적용합니다. 피조물은 존재와 능력, 의지의 근원을 스스로에게서 갖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렇다면 악마의 타락도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대화는 이 의문을 곧장 결론으로 처리하지 않고, 악마가 “진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는 성서 표현을 분석합니다. 악마는 끝까지 바르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내·지속(perseverantia)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받지 못했을까요? 하느님이 주지 않아서일까요, 악마가 받아들이지 않아서일까요? 제자는 처음에는 하느님이 주지 않으신 것이 원인일 수 있다고 의심합니다. 스승은 인내를 지속적으로 바르게 있으려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시작할 때는 계속 머물려는 의지가 있어도, 그 의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면 인내를 완성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

가장 좋은 것

좋다는 가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담배를 좋아하지만 담배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술 자체를 싫어하고, 또 누군가는 술을 즐기지만 만취하는 것을 싫어하고, 또 누군가는 진탕 마셔야 술 맛이 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다'는 가치는 정말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요? '취향'에 있어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팝음악을 좋아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 클래식을 좋아할 수 있지요. 그건 오히려 다채로울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가치에 있어서 '좋고 나쁨'이 그때그때마다 달라진다면 큰일입니다. 참된 진리에 있어서는 두 가지 진리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선이 어떤 경우에는 선이다가 다른 경우에는 악으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것은 가장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선은 오직 하나 뿐이고 하나의 가치로 정립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그분이 의도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우리에게 가장 올바르고 확실하게 전달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성령'은 그 자체로 가장 좋은 가치인 셈입니다. 문제는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것이 우리가 '좋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에게 좋은 미래를 선물하기 위해서 지금은 학교를 가라고 독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좋은 가치이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당장은 힘들고 싫은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신앙 안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 앞에 드러나는 '좋아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연휴에 성당을 챙겨 가는 것보다 그냥 여행을 다니는 것이 더 좋은 선택처럼 보입니다. 계명을 따라서 허덕이듯이 살기보다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

2026년 10월 4일 주일 [(녹) 연중 제27주일]

  포도밭에 일어나는 일 우리는 축복과 저주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젊은 친구가 어린 나이에 인기 스타가 되어서 수많은 부와 명예를 쥐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아마 많은 이들은 '복받았다'라고 하면서 부러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어린 나이에 얻었으니 그건 분명히 복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미숙한 영혼에 부어진 세상의 부귀 영화와 명예는 흔히 그 영혼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절제를 훈련하고 세상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주어진 돈의 가치는 가난한 이를 돕고 선한 일을 하는 데에 올바르게 쓰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 부어진 돈은 흔히 자신의 쾌락을 채우고 타인 앞에 으스대는 데에 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신앙의 올바른 관점 안에서 그가 받은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셈입니다. 그럼 다른 주제를 살펴봅시다. 어린 친구가 성숙한 스승 아래에서 여러가지 혹독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건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사람들은 이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나 세상 살이가 더욱 편해지고 좋은 것이 가득한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 놓인 사람을 두고 '불쌍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이를 두고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의 내면에 올바른 영혼의 길을 훈련하기 위해서 외부의 시련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얻게 될 영원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신앙인은 그를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젊은이들을 성소의 자리에 보내면서 하는 일입니다. 소위 성직자와 수도자의 자리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거북하고 도망치고 싶은 자리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들에게 닥치게 될 시련과 고난을 알면서도 그들이 선택한 길을 축복하고 칭찬합니다. 이제 1독서로 돌아와 봅시다. 이사야서는 포도밭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전반부에서 포도밭에 이루어지는 주인의 돌봄을...

평화를 왜 싫어하는가? 2026년 10월 1일 목요일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평화라는 것은 물건이 아닙니다. 평화라는 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평화는 준다기보다 평화를 누리도록 준비시켜 준다는 것이 더 합당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어보자면 우리는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냥 서울대 졸업장을 받고 그 스펙을 누리기만 원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서울대를 간다는 의미는 그만한 수준의 학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졸업하게 해 주겠다는 말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나는 공부를 하기 싫고 고생하기 싫지만 그 열매인 졸업장을 원하고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서울대를 졸업하게 해 주겠다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만한 수준의 학식과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대학은 학업을 성장시키고 인격을 성숙시키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것은 평화 그 자체를 대상화해서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가능하게 됩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루카 10,5-6) 평화를 받을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내가 몰랐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그것을 성취하는 법을 잘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 달리 말해서 평화를 배우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들은 성가신 존재입니다.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안정, 이미 누리고 있는 세속적 안정을 불안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때가 되면 떠나갈 뿐입니다. 사실 온 것도 자신들의 의지로 온 게 아닙니다. 보냄을 ...

2026년 9월 27일 주일 [(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모두가 죽는다 오늘 1독서에는 죽는다 산다 하는 표현이 나오지만 사실 모두가 죽습니다. 그래서 1독서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진정 무엇이 죽는다는 것이고 무엇이 산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때로 우리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죄를 짓는다고 무조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서 얻게 된 부귀 영화로 우리의 육신을 더 잘 가꿀 수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죄는 영혼을 죽입니다. 반드시 죽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죄를 '사죄' 즉 죽을 죄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회개는 영혼을 살립니다. 죄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고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지상의 삶은 어찌 보면 '기회'입니다. 영혼의 죽음과 동시에 육신도 죽어 버린다면 우리에겐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이 지상의 삶은 당신의 자비입니다. 나아가 2독서는 우리의 영혼을 더 활력있게 가꾸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지만 때로 죄인들의 짐을 우리가 대신 짊어질 때에 우리는 거룩하게 됩니다. 혹자는 그런 삶을 '손해본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만을 두고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사는 사람이고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한 보상을 마련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손해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

자랑스러운 것 / 부끄러운 것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을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만천하게 공개합니다. 술꾼들의 모임에 가면 자신이 얼마나 비싼 술을 먹었으며, 얼마나 많은 술을 먹었는지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들 멍청해 보일 뿐이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만한 자랑거리가 따로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술을 마시고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했는지도 자랑하기도 합니다. 경찰에게 음주에 걸렸는데 교묘하게 피했다는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무용담인양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모임 안에서 그것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취하는 이들은 어리석음을 자랑거리로 삼으니까요. 반대로 부끄러운 것은 숨깁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가난하고 무식한 것을 숨기려고 애를 씁니다. 한 번은 한 자매가 자신이 친구 모임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꾸준히 거짓말을 해 왔다는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학벌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의 술꾼들의 모임처럼 그녀는 그런 종류의 모임에 나갔을 뿐입니다. 즉, 화려하고 값비싸고 고급진 것을 자랑으로 삼는 모임에 나갔고 또 그녀 자신 내면에도 그런 것을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마음이 들어 있었던 것 뿐입니다. 맑은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습을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맑은 정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거룩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한 하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반대로 세상에 온통 빠져들어 휘둘리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이제 신앙으로 건너옵시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을 드러내고 수치스러운 것을 감춥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자녀를 자랑할 때에 우리 자녀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랑할까요, 아니면 학교에서 100점을 맞고 번듯한 직장에 돈을 왕창 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까요? 반대로 자녀가 세속에 온통 빠져 하느님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까요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