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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경은 좋은 말만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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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과 영광

우리가 부름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우리의 삶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체크하면 됩니다.  1. 나는 '의로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2. 나는 '영광스러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1. 우리의 하루의 삶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어둠에서 정화되어 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내면 속에 하느님이 이끄시는 '의로움'의 갈증이 생겨나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똑같은 욕구에 똑같은 악습에 시달리고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더 어두움에 빠져들고 있을까요? 이 부분을 진지하게 묵상해 본다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이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우리가 영광 속에 들어간다,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도 그것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중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마치 금속에 불에 정련되듯이 뜨거운 시련을 통해서 영혼은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검증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정에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모든 규정을 바르게 따르며, 저는 온갖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 당신의 법 하도 놀라워, 제 영혼 그 법을 따르나이다.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밀과 가라지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오늘 복음은 중요한 부분을 거의 대부분 설명합니다. 즉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종말에 저마다의 행실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설명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가 의인이 되고 누가 악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으면 마치 의인과 악인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이거나 처음부터 악인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골고루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할 일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씨앗에 물을 줄 것이며 어떤 씨앗을 키워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세상에 살지만 여러분이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여러분을 진리로 이끄는 가르침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저는 사제로 살아가지만 제가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저를 유혹으로 세상으로 이끄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예외없이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별하고 거기에 물을 주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겨자씨가 자라나 나무가 되듯이, 여러분과 저의 영혼 속에 심겨진 씨앗은 자라나 나무가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살지만 그 어느 신부님보다도 더 신심있고 거룩한 평신도들을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룩한 직분을 지니고 살지만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세속적인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섞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지켜 보시다가 결국 우리가 행한 것들에 따라 그에 적합한 결과를 선물하실 것입니다. 성...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우리는 '힘'이라고 하면 외적인 힘만을 생각합니다. 즉, 돈의 위력이나 권력과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내적인 힘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외적인 힘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즉, 인내가 없기 때문에 쉽게 구타하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식입니다. 내적인 힘, 즉 참을성과 인내가 있고 참된 신심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고, 하느님의 거룩한 정의에 모든 것을 맡길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외적으로 자신의 힘을 표출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사람에게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1. 의인에게 있어서 인자함이라는 덕의 발전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의 실현을 당장에 성급하게 하지 않는 것은 먼저 의인에게 있어서는 그들도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의인의 내면의 '사랑'이 더욱 커져서 심지어는 죄인들에게마저도 그 인자함을 펼칠 수 있기 위함입니다. 2. 죄인에게 있어서 회개의 기회 하느님은 죄인들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대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언제든지 정의를 실현해서 죄인을 멸망으로 몰아 넣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충분히 기다려 주십니다. 그래서 화답송은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보는 데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벌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내면 속에 벌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에게는 침이 있고 그 침에 쏘이면 심하게 아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는 벌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벌이라는 것은 작고 이쁜 날라다니는 것이지만 어른에게는 벌이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신앙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유롭게 선물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내면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긴가민가한 대상입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배를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배고픔 또는 쾌락은 확실한 표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배고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고 나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떻게든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작용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뜻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멀리 이민간 아빠라서 지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 아빠가 한 약속을 철썩같이 믿는 아이는 훗날 아빠가 돌아올 때에 그 약속에 상응하는 응답을 얻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을 선물해 주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가운데에는 얼른 이 미사를 마치고 내 입에 들어올 음식이나 내가 만날 사람, 내가 할 일, 내가 벌어들일 돈에 대한 염려가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성경이 말하듯...

나의 말은 완수될 것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한 사람의 말은 그 당사자의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지 아닌지는 얼마나 멋들어지고 정교한 말로 표현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실행할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초등학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하는 것과 실제 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의대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가 강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때로는 장애물에 가로막히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들으면 때로 반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불합리해 보이고 불완전해 보이고 심지어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악한 이들이 선한 이들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가는데 의인들은 고통당하기만 하고 아무리 하느님께 부르짖어도 하느님은 들은 척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우리의 한계는 우리가 오직 눈에 보이는 영역에서만 답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일생이라는 시간적 한계 속에서만 결과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을 내릴 이유도 없고 조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을 쥐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 안에서 당신의 섭리대로 일을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계란 후라이를 하기 위해서 계란을 깨는 순간에 누군가 와서 '아! 아직도 계란 후라이가 안되었어?!'라고 한다면 정말 이상한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라이팬이 달궈져야 하고 기름을 둘러야 하고 그리고 익히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갓 시작한 요리를 두고 왜 완성이 되지 않았느냐고 따져봐야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느님은...

마땅한 사람을 찾는 법 2026년 7월 9일 목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1독서에는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특히나 다음의 구절이 절절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호세 11,4) 우리는 하느님을 막연히 먼 분으로,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있고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충실한 외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할 사도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파견에 앞서 지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을로 가야 하고 마땅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찾아가실 때에 사람을 찾는 법이 잠깐 등장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사무 16,7)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도들 역시도 사람들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사실 마음으로 찾은 그 마땅한 사람을 통해서 일이 진행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뜻 세상을 돌아보면 많은 돈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일을 합니다. 목마른 마음이 영혼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이 기쁨을 표현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찾아오지 않고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드시 찾아갑니다. 의지가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서라도 위대한 일을 해내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놓여 있어도 모든 것을 허비해 버리고 맙니다. 복음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을 자신의 가까이 두는 것은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돈을 주거나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빌어 줍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수용자에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