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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목자

최근 글

타락한 세대와 고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고난' 다른 말로 '고통'입니다. 하지만 고난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존재합니다. 겪지 말아야 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이 있고 자진해서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먼저 겪지 말아야 하는 고난은 스스로의 그릇된 선택으로 주어지는 고난입니다. 지나치게 담배를 피워서 폐가 겪는 고난은 내가 멈춰야 하는 고난입니다. 스스로의 몸에 부담을 주면서 나중에 그것이 몸의 통증으로 나타나면 그때에 사람들은 불평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본들 소용이 없는 것이 그것은 스스로가 불러들인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세상의 힘에 기대려고 합니다. 즉 돈을 많이 벌어서 스스로 불러들인 고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일시적인 위안은 얻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면 그릇되이 걷고 있는 자신의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를 회개라고 부릅니다. 다음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사회 안에서 한 명의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배워야 마땅하고 여러가지 일들을 겪어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당연히 수고가 들게 마련입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우리가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습니다. 또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나무가 쓰러질 수도 있고 태풍이 오면 창문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 앞에서 서로 힘을 모아 도와 가며 이겨내야 합니다. 이런 고난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그릇을 넓히고 나아가 서로 연대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번째 고난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성소는 어떻게 시작되고 자라날까?

사실 모든 과정은 신비에 감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성소에 들어서는 여정은 저마다 다 다르고 그 과정 역시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어떤 영혼을 선택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저마다 각자의 응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그것을 통틀어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찬찬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출발 먼저는 아예 모르는 것을 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을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성소에 있어서 '초대'는 그 시작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하다. 그 초대가 반드시 '신학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될 필요는 없다. 다만 누군가 초자연적인 이상을 향해 초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성소의 시작은 신학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시작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대는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 첫 시작점을 전달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특히 부모의 역할은 중요한데 부모의 조력 속에서 성소의 길을 가는 것과 부모의 반대, 혹은 무관심 속에서 성소의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은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시작부터 그 의지를 꺾인다면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부모는 기도해 주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성소의 싹이 자라난 자녀에게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 다음으로는 부르심이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소방관이나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꿈꾸는 것과 실제로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어린 시절 표현되는 성소의 싹은 좋은 계기이지만 사실 그건 성당을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

무엇을 믿어야 할까?

수학의 명제는 의심받지 않는다. 1에다 1을 더하면 2가 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의 명제는 곧잘 의심받는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부터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그분의 뜻과 그분이 하시는 일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예컨대 성경을 믿으라 하지만 성경은 곧잘 의심의 대상이 된다. 올바르게 전파된 것인지 올바르게 번역된 것인지. 애시당초 성경이 인간에 의해 짜집기 된 책은 아닌지? 또 교회를 믿으라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바람직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오류, 심지어는 지도자들의 오류를 통해서 사람들은 신앙에서 멀어져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일종의 세뇌와 정신착란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 신앙인은 거대한 집단 광기의 희생양일 뿐일까? 신앙은 수학이 아니다. 신앙은 '의지'와 관련된 것이고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물'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물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맑은' 물이 있다. 오염된 물이 있고 먹지 못하는 물이 있는가 하면 덜 오염되고 더 맑은 물이 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더 맑은 영혼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순수의 절정에 계신 분, 물 자체를 만들어 내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수용은 신앙인에게 가장 첫 단계를 형성한다. 깨끗해질 의지가 없는 이는 순수함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존재의 타락을 체험하고 있는 이들, 그래서 정화의 필요를 느끼는 이들이 더 맑은 물을 찾게 마련이다.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셈이다. 이 첫 갈증으로 신앙에 발을 내디딘 이는 그때부터 여정이 시작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참으로 이 여정을 걷는 이들만이 아는 것이다. 이 여정을 시작도 하지 않...

모두 저마다의 길로 간다

우리는 저마다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마냥 다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작게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부터 이 일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함께 이득을 얻기를 바라기에 회사가 잘 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 일을 합니다. 나아가 이런 방향은 정치색으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이상에 따라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고 그 길을 함께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영혼의 결, 또는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길과는 다르게 영혼의 방향은 오직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하느님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견대로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영혼을 이끌어야 하는 소명을 지닌 이들이 저마다의 인간적 약점으로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은 의외로 뚜렷하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스승을 따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만나를 먹은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아닌 세속적인 이상을 뒤따른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질 것입니다. 그릇된 길을 스스로 선택한 탓입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오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 저마다의 보속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필리포스와 내시는 같은 뱡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들은 마치 소금이 물에 녹듯이 서로를 만나 알아보고 신앙의 정수를 빨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바라는 것을 얻는 법입니다. 신앙을 정말 배우고 싶은 신앙인은 사제에게서 거룩함을 찾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욕구가 가득한 신앙인은 사제를 이끌어 술을 배우게 만들고 도박을 하게 만들고 고급 스포츠를 즐기게 이끌어 버립니다. 그리고서는 마치 자신이 그 사제에게 좋은 것...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근본 '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죄일까요? 사실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러 이러한 것이 죄라고 하니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주일 미사 빠지면 죄라고 하니 그게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죄의 근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라고 생각하고 죄가 아닌 것도 죄라고 생각하는 셈이지요. 빛과 어둠을 가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태양은 빛입니다. 반대로 태양이 사라지면 어둠이 시작되지요. 하지만 이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전등불이 들어와 빛이 비치면 이건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태양보다 어두우니 어둠이 될 수도 있고 밤보다 밝으니 빛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복잡합니다. 원래는 복잡하지 않은데 인간이 복잡한지라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십니다. 이는 신앙인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명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선한 분은 아버지 한 분 뿐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 10,18) 그렇다면 선은 분명합니다. 선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선'은 하느님께 다가서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반대의 방향과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모두 죄스런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방향성과 움직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들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분류하는 '죄인들'보다 상당히 우위를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 생활 속에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극단적으로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에게로 다가서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기에서는 답이 갈립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극단적으로 고수하려고 드는 율법의 형식 속에서 하느님이 의도하는 것에서 도로 멀어질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일은 ...

요셉에게 일어난 일

요셉에게 일어난 일을 구조화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합리한 상황 - 거룩한 지시 - 믿음의 수락 먼저는 불합리한 상황이 생겨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합리한 일들도 있고 말도 안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신앙'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의 범주 안에서 할 일이면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 역시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는 '파혼'이라는 정상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요셉의 좋은 성정대로 그 파혼을 '남 모르게' 준비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요셉이 다루어야 하는 일은 정상적인 범주의 일을 벗어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내면에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거룩한 지시가 등장합니다. 요셉에게는 그것이 꿈이라는 수단으로 주어졌지만 꿈이라는 수단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범주에서는 교회나 영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믿어야 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이의 거룩한 명령을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 거룩한 지시를 무시합니다. 그건 오늘날 교회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거룩한 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코미디언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의 근원적인 행방의 문제를 교회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믿음으로 수락합니다. 복음은 이를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순종, 순명은 대표적인 믿음의 수락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수도자들도 장상에게 순명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대인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거부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은 모두 스스로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