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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4일 주일 [(녹) 연중 제27주일]

  포도밭에 일어나는 일 우리는 축복과 저주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젊은 친구가 어린 나이에 인기 스타가 되어서 수많은 부와 명예를 쥐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아마 많은 이들은 '복받았다'라고 하면서 부러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어린 나이에 얻었으니 그건 분명히 복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미숙한 영혼에 부어진 세상의 부귀 영화와 명예는 흔히 그 영혼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절제를 훈련하고 세상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주어진 돈의 가치는 가난한 이를 돕고 선한 일을 하는 데에 올바르게 쓰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 부어진 돈은 흔히 자신의 쾌락을 채우고 타인 앞에 으스대는 데에 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신앙의 올바른 관점 안에서 그가 받은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셈입니다. 그럼 다른 주제를 살펴봅시다. 어린 친구가 성숙한 스승 아래에서 여러가지 혹독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건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사람들은 이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나 세상 살이가 더욱 편해지고 좋은 것이 가득한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 놓인 사람을 두고 '불쌍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이를 두고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의 내면에 올바른 영혼의 길을 훈련하기 위해서 외부의 시련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얻게 될 영원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신앙인은 그를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젊은이들을 성소의 자리에 보내면서 하는 일입니다. 소위 성직자와 수도자의 자리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거북하고 도망치고 싶은 자리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들에게 닥치게 될 시련과 고난을 알면서도 그들이 선택한 길을 축복하고 칭찬합니다. 이제 1독서로 돌아와 봅시다. 이사야서는 포도밭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전반부에서 포도밭에 이루어지는 주인의 돌봄을...

평화를 왜 싫어하는가? 2026년 10월 1일 목요일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평화라는 것은 물건이 아닙니다. 평화라는 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평화는 준다기보다 평화를 누리도록 준비시켜 준다는 것이 더 합당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어보자면 우리는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냥 서울대 졸업장을 받고 그 스펙을 누리기만 원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서울대를 간다는 의미는 그만한 수준의 학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졸업하게 해 주겠다는 말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나는 공부를 하기 싫고 고생하기 싫지만 그 열매인 졸업장을 원하고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서울대를 졸업하게 해 주겠다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만한 수준의 학식과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대학은 학업을 성장시키고 인격을 성숙시키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것은 평화 그 자체를 대상화해서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가능하게 됩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루카 10,5-6) 평화를 받을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내가 몰랐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그것을 성취하는 법을 잘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 달리 말해서 평화를 배우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들은 성가신 존재입니다.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안정, 이미 누리고 있는 세속적 안정을 불안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때가 되면 떠나갈 뿐입니다. 사실 온 것도 자신들의 의지로 온 게 아닙니다. 보냄을 ...

2026년 9월 27일 주일 [(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모두가 죽는다 오늘 1독서에는 죽는다 산다 하는 표현이 나오지만 사실 모두가 죽습니다. 그래서 1독서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진정 무엇이 죽는다는 것이고 무엇이 산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때로 우리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죄를 짓는다고 무조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서 얻게 된 부귀 영화로 우리의 육신을 더 잘 가꿀 수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죄는 영혼을 죽입니다. 반드시 죽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죄를 '사죄' 즉 죽을 죄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회개는 영혼을 살립니다. 죄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고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지상의 삶은 어찌 보면 '기회'입니다. 영혼의 죽음과 동시에 육신도 죽어 버린다면 우리에겐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이 지상의 삶은 당신의 자비입니다. 나아가 2독서는 우리의 영혼을 더 활력있게 가꾸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지만 때로 죄인들의 짐을 우리가 대신 짊어질 때에 우리는 거룩하게 됩니다. 혹자는 그런 삶을 '손해본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만을 두고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사는 사람이고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한 보상을 마련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손해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

자랑스러운 것 / 부끄러운 것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을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만천하게 공개합니다. 술꾼들의 모임에 가면 자신이 얼마나 비싼 술을 먹었으며, 얼마나 많은 술을 먹었는지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들 멍청해 보일 뿐이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만한 자랑거리가 따로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술을 마시고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했는지도 자랑하기도 합니다. 경찰에게 음주에 걸렸는데 교묘하게 피했다는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무용담인양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모임 안에서 그것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취하는 이들은 어리석음을 자랑거리로 삼으니까요. 반대로 부끄러운 것은 숨깁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가난하고 무식한 것을 숨기려고 애를 씁니다. 한 번은 한 자매가 자신이 친구 모임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꾸준히 거짓말을 해 왔다는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학벌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의 술꾼들의 모임처럼 그녀는 그런 종류의 모임에 나갔을 뿐입니다. 즉, 화려하고 값비싸고 고급진 것을 자랑으로 삼는 모임에 나갔고 또 그녀 자신 내면에도 그런 것을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마음이 들어 있었던 것 뿐입니다. 맑은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습을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맑은 정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거룩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한 하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반대로 세상에 온통 빠져들어 휘둘리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이제 신앙으로 건너옵시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을 드러내고 수치스러운 것을 감춥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자녀를 자랑할 때에 우리 자녀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랑할까요, 아니면 학교에서 100점을 맞고 번듯한 직장에 돈을 왕창 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까요? 반대로 자녀가 세속에 온통 빠져 하느님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까요 아니면...

고통과 평화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몸이 겪는 것은 분명한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전에 있을 때에 갑자기 배에 통증이 와서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119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저에게 생생합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몸을 지배하고 다른 일체의 활동을 막아 버립니다. 하지만 고통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면으로도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척 당하고 배신 당하고 배반 당할 때에도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헌신했는데 도리어 그들이 투서를 넣었다는 소식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그들은 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진짜 고통은 사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모든 근원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건 정신이건 고통을 겪을 때에 그 근본에는 '죽음의 위협'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 실제로 죽음으로 이끌어갑니다. 육체의 중한 질병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최근에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즉,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상황이 이러니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껏 시달려 온 것에서 일순간에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 밥을 먹다가 갑자기 빵으로 식사를 바꾸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늘 익숙해져 온 삶의 위협에서 해방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여전히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일시적인 해방과 탈출구를 찾아 헤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지닌 사람들, 성경은 그들을 '어리석은...

당신은 신앙 안에서 무엇을 받았는가?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의 원칙은 뚜렷하고 이는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바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바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는가?" 오늘 한 분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손에 선물을 쥐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에게 달리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머리에 조용히 손을 얹고 안수를 해 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손에 쥐어진 것 뿐입니다. 그들에게 사제가 주는 거룩한 축복의 안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것이 다 사라져도 하느님의 축복이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은 '향유'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의인은 '용서와 구원'을 바라봅니다. 서로 탐하는 게 달라서 얻는 것도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오늘날의 신앙 환경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는 길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뭔가 결과가 있어야, 눈에 보이는 뭔가가 있어야 얻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주는 향유를 아까워하고 여인이 받는 용서를 의미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죄인은 기껏해야 향유를 아낀 값이나 벌고 의인은 구원의 기쁨을 얻어 누립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속일 수 없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얻고 누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신앙 의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얻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주일미사나 지키고 판공이나 보는 것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세금이나 겨우 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주님에게서 무언가 얻을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언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의미 없게 여길 것이고 하찮게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주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