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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신앙생활?

최근 글

행복의 다른 기준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에게 규정하는 기준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행복해지는 방법'은 따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세상 안에서 성공하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그걸 추구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고 이뻐지고 싶어하고 유명해지고 싶어하고 권력을 쥐고 싶어합니다. 그게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더욱더 메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행복의 기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딴세상 말씀 같습니다. 가난한데 어찌 행복할 것이며 슬퍼하는데 어찌 행복할 것입니까? 만일 누군가가 인스타그램에 후줄근한 옷을 입고 맨날 펑펑 우는 모습을 올리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정말 말도 안되는 구절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우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믿겠습니까? 아예 듣기조차 거북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 맞는 걸까? 혹시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진리가 있지는 않을까?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그저 '신앙'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을 정말 보기를 원하고 배우기를 원해야 비로소 신자가 됩니다. 그저 성당을 다닌다고 미사 때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에 신자, 즉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

우리는 가난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표현들을 듣고 있자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가난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가련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 남들이 무시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가난과 가련함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그저 돈이 없는 가난을 말하고 처참한 몰골의 가련함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에 피신한다'라는 개념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이들입니다. 나아가 그들의 특성이 앞서 서술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찾는 이들이고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겸손한 이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백성의 가난함과 가련함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해서 가난함을 느끼고 하느님 앞에서 지극히 낮은 존재로서 살아가기에 가련한 이들입니다. 설령 그들이 세상의 모든 부를 쥐고 있더라도 그들은 하느님이 없이는 가난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어도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기자신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난과 가련함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실질적인 부가 있거나 없거나 그것은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가 있다면 그 부를 가지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이고 없으면 없는대로 딱히 욕심내지 않고 필요한 것을 찾으며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이들입니다. 또한 그들의 가련함은 그저 자신을 낮추기만 하는 가련함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련함은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실행합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오히려 그...

예수님의 첫 선포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죄에서 돌아서라는 회개의 메세지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올바른 목적지를 선포하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신앙생활은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만일 신앙 안에서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수영장에 가서 등산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신앙이라는 것, 즉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보이는 대상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확인하면 그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약속된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에 목마른 자들에게 선포됩니다. 신앙은 죄에 억눌려 본 이들, 세상의 어두움에 시달려 본 이들에게 선물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 안의 어떤 대상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원으로부터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가득 찬 방을 치우지도 않고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손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과제는 ‘회개’가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비워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탐욕과 이기심, 시기심과 증오, 원한과 분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빛이신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길을 나서면 방향을 올바로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과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길을 나서면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차를 운전한다면서 목적지도 정해놓지 않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올바른 목적지를 뚜렷이 하고 시...

어둠과 빛

어떤 것을 어둠으로 느끼느냐 하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누군가는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빛으로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어둠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미사를 싫고 귀찮고 어려운 어둠처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미사를 우리의 영혼을 밝히는 빛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시려는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빛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둠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신앙생활 안에서조차 엉뚱한 빛을 찾아다닙니다. 그들은 신앙이 자신의 현세의 안정을 보장해주고 병고를 치유해주고 곤란을 덜어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하느님에게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성경 안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이들의 곤란함을 덜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것 자체가 빛은 아닙니다. 그런 실마리는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마지막에 당신에게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이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즉, 병고의 치유와 구원의 선포가 분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병을 치유받는 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려는 빛은 영혼을 밝히는 빛이고 영원에 가 닿는 빛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것들이 어둠과 암흑을 형성합니다. 지금 현대의 한국 사회는 외적으로 어마어마한 부흥을 겪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암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훈육을 상실해 버렸고 내면의 여러가지 가치와 덕들을 더는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욕구는 그 즉시 채워져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한탄을 하고 불만을 가지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우리에게 선물된 빛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어둠을 벗어버리는 훈련을 하고 나아가서 참된 빛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빛이 됩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던 것을 얻는 이들은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여정...

모든 사람에게 받는 미움

우리가 화목하게, 혹은 화목한 듯이 지내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한 점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굳이 상대의 아물어가는 상처를 헤집어 괴롭힐 이유는 없기에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알면서도 딱히 반응하지 않고 서로의 선을 존중하며 지냅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직무상의 관계에서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직장이라는 곳은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를 다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사의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필요에 따라 협업하기도 하면서 일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이 쉽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가야 하는 길이 뚜렷하고 그 목적에 상반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악을 견제하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실천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는 거라면 우리는 서로 좋은 얼굴을 하고 지내면 그만입니다. 상대가 선하건 말건 상관이 없습니다. 공동의 이익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그에 반대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칩니다. 그것이 오늘 스테파노의 순교 기념일이 시사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왜 죽어야 했을까요? 그들이 선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착한 표양을 보인다면 그들은 도대체 왜 순교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선의 실천이 악인들에게는 곧 그들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과일 가게에 가서 귤을 먹든 참외를 먹든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 원하는 과일을 가지고 있는 돈만큼 사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문제는 다릅니다. 선이 머무는 곳에는 악이 설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선한 이들,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이들은 세속을 뒤쫓아가는 이들에게...

미움 받을 용기

사람은 사실 사랑받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생존하는 것이 육체의 본능이라면 사랑받고 또 사랑하는 것이 영혼의 본질적인 활동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도달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머무르는 이 세상은 다릅니다. 이 세상은 원죄 이후로 사람들의 죄와 어둠이 누적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쓰레기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도 쓰레기를 치울 필요가 없지만 쓰레기가 있는 곳에서는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우는 수고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그 어떤 영적인 쓰레기도 없는 곳이기에 모두가 기쁘게 생활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다른 상황입니다. 이곳에는 영혼의 쓰레기가 존재합니다. 탐욕과 이기심이 존재하고 악의와 격분, 증오와 원한이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워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사명을 나누어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이 내어놓는 악의 결과물을 자신의 영혼 안에 담아 치워내는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를 치운다고 표현하면 참 좋은 일 같지만, 쓰레기를 치운다는 것은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과 활동을 부정하는 일이 되고 자연스레 그들의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받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악은 언제나 무죄한 이들을 피해자로 삼고 또 의로운 이들을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살아갈 때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순둥한 사람, 성격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악에 맞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모든 세대에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언자는 언제나 박해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죽이고 나서야 그들의 무덤을 꾸미기 시작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