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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보다

최근 글

성장하는 교회 / 쪼그라드는 교회

사도행전은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원래는 한 사람이 하던 일을 이제는 쪼개기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사도들이 말씀도 전하고 식탁의 봉사도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신도들이 늘어나고 일이 많아짐에 따라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고유 능력에 속한 말씀 선포에 더 열중하고 반대로 식탁의 봉사라는 직분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확연히 줄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전에 나뉘어졌던 것들이 합쳐져야 할 시기입니다. 이런 저런 직분들 가운데 사실상 거의 쓸모가 없는 직분들이 거두어들여져야 합니다. 심지어는 사제의 삶도 전에는 챙겨받던 것들을 이제는 스스로 해야 합니다. 식관을 구하는 것은 사치가 되었고 알아서 살림을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핵심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요의 시기를 거쳐오면서 엉뚱한 일들에 많이 매진했습니다. 정작 말씀은 소홀히 한 채로 외적인 요소들을 성장시키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아 왔고 이런 모습은 아직도 관찰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과연 우리의 영적 집은 어떤 것이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우리가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느님께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현대의 세상은 사실 신앙의 본질을 부끄러워합니다. 때로 성당에 사진을 찍으로 오는 분들에게 '성당에 사진만 찍으러 오시지 마시고 성당을 한 번 나와 보시죠.'라고 하면 저를 이상한 잡상인 쳐다보듯이 보는 시선을 느낍니다. 과거에 교회가 성장세일 때에는 교회에 나오라고 초대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었고 그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것을 주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지금 이 쪼그라드는 시대에 교회로 초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에...

짐승의 죽음에 대한 책임

성경은 종종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표현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에서 그에 상응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환시 속에서 그의 앞에 수많은 짐승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온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식별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사실 세상의 창조의 모든 과정을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분이 만드신 모든 짐승들도 그 자체로 깨끗하고 좋은 것들입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이들이 우리 자신들, 즉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래서 '선교'를 고유한 사명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도 선교에 대한 명령이었지요. 우리는 할 만해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고유한 이름을 달고 있다면 말이지요. 우리는 다만 하느님과 그들 사이에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감히 그 연결을 끊어버릴 자격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짐승이 짐승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들의 탓이 아니라 그 중간 역할을 하지 않는 우리 신앙인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듣지 못한 것을 누가 그들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몫을 해내지 않고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탓으로 회개하지 못한 그들에 대한 책임까지도 지게 될 것입니다. 칼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였는데 칼이 쳐들어와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잡아간다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잡혀가는 것이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내가 파수꾼에게 묻겠다. (에제 33,6)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내...

참된 목자

그저 온순함이 양의 성정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양의 핵심은 목자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온순해도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목소리, 즉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다면 그를 양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는 그저 성정이 온순한 들짐승일 뿐입니다. 목자의 목소리는 어떻게 알아볼까요? 그것은 그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에서 드러납니다. 목자는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부릅니다. 목자가 하는 모든 활동은 구원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구원으로의 초대는 마냥 쉬운 길만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힘을 길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목소리는 때로 우리를 고난으로 초대하기도 합니다. 물론 목자가 고난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기에 그 방향으로 초대하다 보면 고난이 생기는 것 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부모님의 자녀 훈육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것을 무턱대고 다 해주기만 하는 부모는 옳은 부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참을성도 길러 주어야 하고 때로는 양보하는 법도 가르쳐야 하며 때로는 용기있게 불의에 맞서는 법도 가르쳐야 올바른 부모가 됩니다. 그저 사달라는 걸 모조리 다 사주고, 해달라는 걸 모조리 대신해 주기만 하면 그 아이는 반드시 그릇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습니다. 자신을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양들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은 목자인 척 양들을 이끌어 그들을 죽음의 길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목자의 목소리를 식별해야 합니다. 그저 '인도자'가 하는 말이라고 무턱대고 믿을 것이 아니라 그가 맺는 열매로 그를 식별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소가 메마른 시대에도 여전히 성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이를 찾고 있습니다. 사실 성소...

타락한 세대와 고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고난' 다른 말로 '고통'입니다. 하지만 고난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존재합니다. 겪지 말아야 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이 있고 자진해서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먼저 겪지 말아야 하는 고난은 스스로의 그릇된 선택으로 주어지는 고난입니다. 지나치게 담배를 피워서 폐가 겪는 고난은 내가 멈춰야 하는 고난입니다. 스스로의 몸에 부담을 주면서 나중에 그것이 몸의 통증으로 나타나면 그때에 사람들은 불평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본들 소용이 없는 것이 그것은 스스로가 불러들인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세상의 힘에 기대려고 합니다. 즉 돈을 많이 벌어서 스스로 불러들인 고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일시적인 위안은 얻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면 그릇되이 걷고 있는 자신의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를 회개라고 부릅니다. 다음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사회 안에서 한 명의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배워야 마땅하고 여러가지 일들을 겪어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당연히 수고가 들게 마련입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우리가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습니다. 또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나무가 쓰러질 수도 있고 태풍이 오면 창문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 앞에서 서로 힘을 모아 도와 가며 이겨내야 합니다. 이런 고난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그릇을 넓히고 나아가 서로 연대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번째 고난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성소는 어떻게 시작되고 자라날까?

사실 모든 과정은 신비에 감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성소에 들어서는 여정은 저마다 다 다르고 그 과정 역시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어떤 영혼을 선택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저마다 각자의 응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그것을 통틀어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찬찬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출발 먼저는 아예 모르는 것을 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을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성소에 있어서 '초대'는 그 시작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하다. 그 초대가 반드시 '신학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될 필요는 없다. 다만 누군가 초자연적인 이상을 향해 초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성소의 시작은 신학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시작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대는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 첫 시작점을 전달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특히 부모의 역할은 중요한데 부모의 조력 속에서 성소의 길을 가는 것과 부모의 반대, 혹은 무관심 속에서 성소의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은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시작부터 그 의지를 꺾인다면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부모는 기도해 주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성소의 싹이 자라난 자녀에게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 다음으로는 부르심이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소방관이나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꿈꾸는 것과 실제로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어린 시절 표현되는 성소의 싹은 좋은 계기이지만 사실 그건 성당을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

무엇을 믿어야 할까?

수학의 명제는 의심받지 않는다. 1에다 1을 더하면 2가 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의 명제는 곧잘 의심받는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부터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그분의 뜻과 그분이 하시는 일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예컨대 성경을 믿으라 하지만 성경은 곧잘 의심의 대상이 된다. 올바르게 전파된 것인지 올바르게 번역된 것인지. 애시당초 성경이 인간에 의해 짜집기 된 책은 아닌지? 또 교회를 믿으라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바람직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오류, 심지어는 지도자들의 오류를 통해서 사람들은 신앙에서 멀어져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일종의 세뇌와 정신착란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 신앙인은 거대한 집단 광기의 희생양일 뿐일까? 신앙은 수학이 아니다. 신앙은 '의지'와 관련된 것이고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물'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물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맑은' 물이 있다. 오염된 물이 있고 먹지 못하는 물이 있는가 하면 덜 오염되고 더 맑은 물이 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더 맑은 영혼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순수의 절정에 계신 분, 물 자체를 만들어 내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수용은 신앙인에게 가장 첫 단계를 형성한다. 깨끗해질 의지가 없는 이는 순수함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존재의 타락을 체험하고 있는 이들, 그래서 정화의 필요를 느끼는 이들이 더 맑은 물을 찾게 마련이다.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셈이다. 이 첫 갈증으로 신앙에 발을 내디딘 이는 그때부터 여정이 시작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참으로 이 여정을 걷는 이들만이 아는 것이다. 이 여정을 시작도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