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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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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오늘날에도 가능한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치 '만병통치약'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가오는 병자마다 손만 대어도 낫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의 창조주이신 분에게 육체적인 병을 치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신다면 새로운 몸을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 메세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우리의 구원자로 다가오신 분은 당신의 치유를 통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유형의 치유를 더이상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간혹 자신을 스스로 '치유자'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실제로 검증에 들어갔을 때에 정말 예수님처럼 치유하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을 해서 병증의 이유도 알고 그 해결책이 나와 있는 병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의 힘을 빌어 치유를 찾는 이가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아프면 병원을 가지 누가 사제를 찾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치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치유는 육체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리'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치유는 영혼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악에 손상을 입고 부도덕함에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구원자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사제의 안수를 필요로 합니다. 믿음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오늘날에도 사제의 치유 권한은 여전히 작동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영혼의 영역에 큰 관심이 없고 따라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도 못하며 사제에게 영적인 치유를 위해서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고해소는 텅 비어 가고 있고 평일미사의 은총에 목말라 하는 이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들 저마다 믿는 대로 되길 바랍니다. 마을이든 고을이...

경계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

지옥은 싫은데 딱히 천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에게 멀어지면 안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착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들에게 딱 좋은 것은 바로 율법, 법규,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건 선을 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최소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것만 지키는 신앙인... 하지만 사랑을 향해 나아가거나 더 이상의 배움을 거부하는 신앙인. 오늘날 주변에서 자주 발견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언뜻 그들은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밭으로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들입니다. 묵시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라는 말의 대상이 되는 이들입니다. 아이를 돌보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은 아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저 아이의 부모가 몇 시에 밥을 먹이고 몇 시에 재우라는 지침을 주었다고 해서 다른 건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그 시간에 아이가 빽빽 우는데도 입에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아이가 제 시간에 잠들지 않는다고 감기약을 먹여서 재운다면 그건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잘못하다가는 아이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규정만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할 일을 하고 겉으로 좋아 보이는 신앙 활동을 하고 있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또한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하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

신앙인의 맛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신앙인의 맛은 복음에 바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착하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착함을 오해합니다. 착함을 그저 무슨 짓을 하든지 다 받아들이기만 하는 태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착함은 순박함, 부드러움, 온유함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착함은 영혼의 올바른 방향을 의미합니다. 휴대폰을 가지고 밤새도록 놀겠다는 아이에게 그저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착하기만' 한 엄마는 사실 착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방임이고 그것은 사실 착한 게 아니라 나쁜 것입니다. 착한 엄마는 그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런 조치가 설령 아이의 미움을 사더라도 그것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착한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신부는 그저 될 대로 대라고 내버려두는 신부가 아닙니다. 일이 올바로 진행되도록 신경쓰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설령 신자들의 반감을 사더라도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착함은 그저 '부드러움'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방향과 그 방향을 굳게 지키려는 용기와 강직함도 들어 있습니다. 나아가 세속적인 요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과 천진함, 그리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바른 것을 지키려는 정의로움도 들어 있습니다. 결국 착함은 특정한 외적 성향 하나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저 나름대로의 하느님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착한 하느님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고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선으로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훗날 우리는 그런 분 앞...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곳에 기꺼이 투자합니다. 나에게 무언가 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은 그 이득을 '자본'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사기꾼들이 득세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겠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이고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생을 한탄하며 살거나 심할 때에는 목숨까지 내다버리곤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이득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여기서 잠깐 검토해 봅시다. 위의 모든 것은 나의 고유한 것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닙니까? 내 양식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 내 공간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옷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시간과 노력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은 모두 나에게 존재하는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에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 설명됩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우리가 나의 것으로 부족한 이들을 채워 줄 때에 그것은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빛을 증가시키고, 나의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며, 의로움이 나의 길을 이끌게 되고, 주님의 영광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큰 이득은 우리가 부르실 때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

어디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우리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그는 꿈꾸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설령 자신에게서 완성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을 지니고 거룩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꿈꾸는 사람들이고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부와 권위도 그의 어두운 마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강박적으로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죄는 그렇게 사람을 옭아매고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처음부터 죄가 심각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마치 미끄러운 내리막처럼 죄는 서서히 한 사람을 더 큰 어둠으로, 더 큰 어둠으로 서서히 내려가게 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죄악을 심심찮게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헤로데는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할 기회,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싶은 기회를 노렸을 뿐이고, 헤로디아라는 악녀는 그의 허영과 교만을 이용해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되었고 남은 평생을 그 죄책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갈까요? 거룩한 희망일까요? 아니면 갈수록 깊어지는 죄악의 어둠일까요? 깊이 묵상하고 회개하고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쉬운 신앙생활?

다윗은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그리고는 그 내용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왜냐하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의 길을 걷고 그분이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쉬운 길을 걷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쉽게 느껴지다가도 나중에는 어려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지킨다는 것은 이 세상이 가르치고 이끄는 방향에 꾸준히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쉬운 게 아닙니다. 복음에서도 같은 상황이 묘사됩니다. 우리는 감상젖은 복음 선포를 꿈꿉니다. 마치 영화 미션에 나오듯이 가운데 앉아서 악기 하나만 불면 자동으로 사람들이 다가와서 신자가 되는 식입니다. 그러나 실제 선교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영화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교는 싫다는 사람에게 다가서다가 거절도 당하는 법이고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싫다는 이유로 욕을 먹기도 합니다. 부모가 가진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해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 수중에 있을 때나 아이들이지 철들고 나면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본당에서 신자들을 사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마음 상하는 일이 있거나 기분나쁜 일이 생기면 돌아서서 뒷담화 하는 것을 우습게 아는 세상에서 사제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일어날 일을 바탕으로 여지를 남겨 두십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