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영혼의 주머니

최근 글

주도권 다툼

다툼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사실 그건 우리 사람쪽에서 바라보는 관점일 뿐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전해지는 바는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2독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권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넓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소유한 것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움직임은 돈에 대한 추구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 돈을 뒤쫓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성당에 좋은 신앙 강좌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광고 문구를 '서울에서 회당 백만원씩 하는 강좌를 이곳에서 무료로 전해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실제로 오는 사람마다 10만원씩만 주더라도 사람들은 좋다고 모여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쥐어 보려고 아둥바둥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우리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멀리 도망가려고 하면 할 수록 죽음은 더울 우리를 치열하게 뒤쫓아오고 결국 하나씩 둘씩 세상에서 사라져 갑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잘난 이도 못난 이도 모두 죽음을 이겨내지는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바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우리를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어떻게든 늘려 보려는 수명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려는 전혀 다른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전혀 다른 생명, 주님은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

자기 일에만 골몰하는 부자들

성경이 말하는 부자에 대한 관점은 바로 그 부로 인해서 비천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세상의 추이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흥미로운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부자가 되도록 하고 많이 벌고 많이 쓰기를 종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할 때에 단순히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우리는 마음을 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공기를 소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어디에나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유함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동시에 그것에서 분리될 때의 고통을 예비하기도 합니다. 예컨데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자체에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동 수단으로서의 필요에 의해서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하지만 내 차를 소유한 사람은 그때부터 그 차가 어디 긁히진 않는지 마음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부유해진다는 것은 내가 가진 영혼의 능력의 상당 부분을 거기에 투자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냥 의미없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없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지닌 부에 골몰하기 시작합니다. 헌데 우리에게는 한정된 자원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삶이라는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세상의 물질에 골몰하는 동안 그 시간들이 소진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생의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쓸데없는 것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허비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심지어 영적인 것도 '소유'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복음처럼 예수님에게 와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 나의 경험 목록에 집어넣을 대상이 되고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체험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영적 탐욕을 알아 차리시고 그들에...

복잡한 신앙?

언뜻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 내용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고 다채로운 주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새방골 성당으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출발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어떤 수단으로 본당에 오려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 오는 사람에게는 새방골로 오는 주요 도로를 가르쳐 주거나 네비에 찍을 주소를 가르쳐 주면 됩니다. 반면 버스를 타고 오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노선이 있고 내리는 정류장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와룡산을 등산하고 있어서 와룡산 정상에서 새방골로 오는 길을 가르쳐 주려 한다면 전혀 엉뚱한 방향과 엉뚱한 길을 알려 주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길과 방법은 정말 다양하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새방골을 찾아오는 법'이라는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은 언뜻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이 표현은 다양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생명을 찾는 법,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법, 구원을 얻는 법, 참된 행복을 찾는 법 등등입니다. 그런 가운데 '율법'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그 근본 목적 속에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핵심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외적으로는 엄청 다양하고 수가 많고 복잡다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핵심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의 모든 계명들을 외우고 하나도 빠짐없이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율법이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가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 여전히 올바른 이해를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에도 언뜻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죄를 없애려는 사회

현대는 '죄'라는 것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적지 않은 부담을 가지는 것도 바로 이 '죄'리는 주제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가톨릭은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종교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오는 데에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죄라는 것이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건 사회의 문제이고, 환경의 문제이고, 심리의 문제이기에 결국 그 어떤 죄도 전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는 성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특히나 심리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영향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는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내 탓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을 부여받은 이들입니다. 그 영역이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자유가 있고 우리는 그 영혼의 자유를 바탕으로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주어지게 됩니다. 행복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고, 생명을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불행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이들이고,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이 근본 방향은 절대로 변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담배를 권하고 담배 피우는 것을 찬양하는 것처럼 악에 물든 사람들은 악의 방향을 좋은 것으로 꾸밀 뿐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죽음이 생명을 이겨본 적은 없고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사실 이 방향을 올바로 아는 것을 두고 성경은 '지혜'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영리함은 사실 성경적 지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저 시험을 잘 치르고 ...

기적을 찾는 군중들

군중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은 호기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호기심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고 악한 일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 우리는 악한 일에 더 호기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군중의 시선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어둠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이야기거리를 얻을 것이고 그것을 퍼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일은 더 많은 장애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군중에게서 떼어 내십니다. 그 사악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군중에게서 떼어놓고 나서야 비로소 '치유'를 선물합니다. 또한 치유 직후에도 그들에게 제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 소위 군중들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언뜻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듯이 읽혀지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신앙에 조금 눈을 뜨고 맛을 본 사람들은 흔히 신앙의 기적들을 신기해 하고 그것들을 찾아다니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기적은 선물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은 로또복권처럼 오는 게 아닙니다. 기적은 하느님을 성실히 사랑하는 이에게 부어지는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기적의 기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기적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마치 향기 나는 곳에 벌들이 모여들듯이 참된 신심을 내면에 간직한 이에게 기적이 찾아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적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오히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갈망을 가진 이에게 주님은 '에파타'하고 영적 눈이 뜨이고 영적 귀가 열리는 기적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의미

  바로 어제 독서에서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그것이 모두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여정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악인의 삶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일련의 행위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올바로 성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교회가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에게 참된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제사는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존재의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제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우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우상은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비록 모양새는 저마다 다 다를지 몰라도 내용은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대조되는 것으로 인간의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대변하는 금송아지상을 세운 것과 같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것이 꼭 외적으로 형태를 지니고 표현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 방향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언뜻 우리 성당은 순례지에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 성당을 왔다 가면 '성지순례'를 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예쁜 등나무 소문을 듣고 그 사진을 찍으러 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탬프'가 있다는 소식에 와서 도장을 찍고 가기도 합니다. 본디 성지 순례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을 내려놓고 거룩한 곳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보다 잘 배우기 위해서 실행하는 고된 여정이라 '순례'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