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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것 / 부끄러운 것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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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평화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몸이 겪는 것은 분명한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전에 있을 때에 갑자기 배에 통증이 와서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119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저에게 생생합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몸을 지배하고 다른 일체의 활동을 막아 버립니다. 하지만 고통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면으로도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척 당하고 배신 당하고 배반 당할 때에도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헌신했는데 도리어 그들이 투서를 넣었다는 소식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그들은 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진짜 고통은 사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모든 근원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건 정신이건 고통을 겪을 때에 그 근본에는 '죽음의 위협'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 실제로 죽음으로 이끌어갑니다. 육체의 중한 질병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최근에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즉,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상황이 이러니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껏 시달려 온 것에서 일순간에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 밥을 먹다가 갑자기 빵으로 식사를 바꾸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늘 익숙해져 온 삶의 위협에서 해방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여전히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일시적인 해방과 탈출구를 찾아 헤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지닌 사람들, 성경은 그들을 '어리석은...

당신은 신앙 안에서 무엇을 받았는가?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의 원칙은 뚜렷하고 이는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바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바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는가?" 오늘 한 분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손에 선물을 쥐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에게 달리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머리에 조용히 손을 얹고 안수를 해 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손에 쥐어진 것 뿐입니다. 그들에게 사제가 주는 거룩한 축복의 안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것이 다 사라져도 하느님의 축복이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은 '향유'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의인은 '용서와 구원'을 바라봅니다. 서로 탐하는 게 달라서 얻는 것도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오늘날의 신앙 환경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는 길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뭔가 결과가 있어야, 눈에 보이는 뭔가가 있어야 얻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주는 향유를 아까워하고 여인이 받는 용서를 의미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죄인은 기껏해야 향유를 아낀 값이나 벌고 의인은 구원의 기쁨을 얻어 누립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속일 수 없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얻고 누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신앙 의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얻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주일미사나 지키고 판공이나 보는 것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세금이나 겨우 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주님에게서 무언가 얻을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언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의미 없게 여길 것이고 하찮게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주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분노 / 용서 2026년 9월 13일 주일 [(녹) 연중 제24주일]

  화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용서에 대한 집회서의 말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이런 것입니다. "분노를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용서라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에 앞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앙심을 품고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죄짓는 사람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이 말은 한 편으로는 맞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간 누구든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우리 눈에 드러난 이들의 죄과는 일부분일 뿐이고 사실 많은 이들의 죄과가 속에서 일어납니다. 아무리 정의로운 판관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사람의 속에 들어 있는 '의도'까지 식별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 내면을 바라보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심판하고 복수하고 죽이고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신앙인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정의를 신뢰하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단순한 이론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에누리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화내는 사람을 만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불의를 견뎌낸 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용서 우리는 용서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흔히 '무조건적인 용서'를 떠올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복음처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니 그냥 모두 용서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 용서의 전제는 뉘우침입니다. 상대가 성실하고 꾸준하게 죄를 짓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인데...

뼈들이 살아나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는 상상하면 끔찍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뼈로 가득찬 계곡입니다. 모르긴 해도 과거에는 이런 장면들이 간간이 보였을 것입니다. 전쟁이나 역병으로 사람들이 떼로 죽어나가면 그런 이들을 모아다가 구렁에다 던져 넣곤 했겠지요. 그러면 훗날에 그곳에는 뼈만 가득한 죽음의 계곡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즉,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뼈만 가득한 곳, 그것이 신심이 메마르다 못해 뼈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과거의 생기가 하나도 없이 늙고 병들어 있는 교회들, 젊은이들은 모조리 떠나버리고 그나마 있던 의욕들마저 메말라가고 뭘 해도 안된다는 죽은 사고만 가득히 팽배해 있는 곳, 바로 뼈로 뒤덮인 계곡과 같은 신앙의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참으로 도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될 리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안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언뜻 자연스러운 대답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 하느님에게 희망을 두는 대답입니다. 그의 답변 속에는 그 질문을 하시는 분에 대한 능력에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된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 당신이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안될 일이면 하느님이 아예 묻지도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보기에도 안되는 일이면 안되는 것이니 애시당초 물어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당신이 묻는 이유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헌데 하느님은 당신이 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을 '예언...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어찌보면 하느님은 꾸준하십니다. 당신의 뜻은 복잡하지 않고 굉장히 뚜렷하고 또 항구합니다. 그건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천주교를 흔히 ‘얌전한 종교’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사실 천주교가 얌전한 종교처럼 보이는 시절은 현대에 들어와서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에 천주교는 성가시고 유별난 종교, 즉 선교하는 공동체였고 사람들을 모으는 종교였습니다. 사도행전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가톨릭 교회가 얌전하다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부과되는 선교라는 뚜렷한 사명에서 도망가고 싶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사실 우리 성당 자체가 선교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당 옆에 세워놓은 김보록 신부님은 프랑스 사람이고 그 머나먼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온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처럼 프랑스 교회가 고상한 척을 하고 얌전만 떨었다면, 흔히 하는 말처럼  지금의 우리 성당 자체가, 아니 우리 한국 가톨릭 교회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신앙에 함몰되어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누리는 신앙의 편안함이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떠나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오늘 미사를 마치면서도 우리는 또 한 번 들을 것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대답하겠지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간단히 말하면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행복을 꾸린다는 구상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공식처럼 보입니다. 많은 돈이 곧 많은 행복의 근거가 된다고 착각하지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는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은 성모님에게 '믿으셨기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믿음이 행복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실 사람들은 쾌락과 행복을 착각합니다. 돈은 우리에게 쾌락을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행복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참된 행복은 외부에서 밀려드는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행복은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충실할 때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행복합니다. 물고기를 바깥에 꺼내 놓으면 너무 힘들어 할 것이 뻔 합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행복합니다. 원숭이를 물 속에 억지로 집어 넣으면 죽고 맙니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곳에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뜻 안에 올바로 머물러 있을 때에 행복합니다. 성모님은 그 행복의 비결을 아셨고 그래서 행복한 분이십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