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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마땅하게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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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마치 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민족,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총알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지구 위에 살면서도 정작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 천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감지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일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 됩니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은 한 민족을 옹기장이 손의 진흙처럼 주무르십니다. 필요없는 부분이 있으면 떼어내고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전에 없던 진흙에서 떼어와 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손에 있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자신의 생애 동안 벌어지는 일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한계를 지닌 우리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영원 속에서 일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찮게 보이는 것이 나중에는 어마어마하게 위대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지금은 대단해 보이는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세대를 거쳐 가면서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는 분이라 당신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께 신실한 이들과 거짓된 이들이 나뉘게 됩니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외적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 영원 속에서 언제나 올바르게 실행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것인가 아닌가로 나뉘게 됩니다. 참으로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신뢰하지 못해서 조급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뚜렷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명한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선과 악의 분리입니다. 선을 근간에 두고 살아온 이들은 결국 하느님의 ...

처녀 딸이 얻어맞다 2026년 7월 28일 화요일 [(녹)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처녀 딸 내 백성이라는 말은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던 순수한 영혼을 지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런 이들이 세속이라는 것에 상처를 입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는 것을 얻어맞는다고 표현하고 세상의 속됨에 상처입어 가는 것을 참혹한 상처를 입는다고 표현을 합니다. 들이라는 곳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하지만 좋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영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무신론의 사상이 팽배해 있고 사람들은 교회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모습을 칼에 맞아 죽은 자들로 표현합니다. 즉 영혼에 생기가 돌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읍 안은 외부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곳으로 바로 교회 안을 의미합니다. 헌데 그 안에는 '굶주림'과 '병'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나아가 이상한 형태의 신앙이 병처럼 사람들에게 번져 나갑니다. 예언자와 사제라는 특정 직분을 콕 집어 이야기합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단순히 역사 중에 있는 한 나라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두 직분 외에도 많은 직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금이나 장수라고 표현했겠지요.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영적인 현실을 다루는 책이고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직분은 예언자와 사제입니다. 즉,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 교회의 현실과도 비슷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직무를 지닌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건물을 지으라고 하거나 인테리어를 바꾸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임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처녀 딸 이스라엘은 지금도 얻어맞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어맞고 있다...

왜 성경은 좋은 말만 하지 않는가?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해서 찾았다는 내용은 듣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물고기가 걸린 그물 비유를 하면서 악한 자들을 가려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다고 표현하느냐고 거북해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흐름'이 존재해 왔고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갈수록 '지옥'에 대한 언급이 약화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빛으로 이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지, 선하다는 것, 책임있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안정되고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둠을 경계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하고 어두우며 영혼에 크나큰 해악을 입히게 되는 것인지를 올바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태극기를 향해 사이렌이 울리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밤늦게 돌아다니면 잡혀가기도 하고 이런 저런 통제 속에서 살아오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예전처럼 밤늦게 다니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노선에서 신앙은 하나의 고삐처럼 여겨집니다. 성당에 오면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성당은 지금의 시대에는 탈출해야 하는 곳처럼 여겨집니다. 문화는 바뀔 수 있습니다. 제도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시선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분이 뜻하시는 바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거부해도 여전히 좋은 것이고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해도 여전히 옳...

의로움과 영광

우리가 부름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우리의 삶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체크하면 됩니다.  1. 나는 '의로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2. 나는 '영광스러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1. 우리의 하루의 삶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어둠에서 정화되어 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내면 속에 하느님이 이끄시는 '의로움'의 갈증이 생겨나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똑같은 욕구에 똑같은 악습에 시달리고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더 어두움에 빠져들고 있을까요? 이 부분을 진지하게 묵상해 본다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이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우리가 영광 속에 들어간다,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도 그것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중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마치 금속에 불에 정련되듯이 뜨거운 시련을 통해서 영혼은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검증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정에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모든 규정을 바르게 따르며, 저는 온갖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 당신의 법 하도 놀라워, 제 영혼 그 법을 따르나이다.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밀과 가라지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오늘 복음은 중요한 부분을 거의 대부분 설명합니다. 즉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종말에 저마다의 행실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설명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가 의인이 되고 누가 악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으면 마치 의인과 악인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이거나 처음부터 악인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골고루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할 일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씨앗에 물을 줄 것이며 어떤 씨앗을 키워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세상에 살지만 여러분이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여러분을 진리로 이끄는 가르침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저는 사제로 살아가지만 제가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저를 유혹으로 세상으로 이끄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예외없이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별하고 거기에 물을 주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겨자씨가 자라나 나무가 되듯이, 여러분과 저의 영혼 속에 심겨진 씨앗은 자라나 나무가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살지만 그 어느 신부님보다도 더 신심있고 거룩한 평신도들을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룩한 직분을 지니고 살지만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세속적인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섞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지켜 보시다가 결국 우리가 행한 것들에 따라 그에 적합한 결과를 선물하실 것입니다. 성...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우리는 '힘'이라고 하면 외적인 힘만을 생각합니다. 즉, 돈의 위력이나 권력과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내적인 힘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외적인 힘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즉, 인내가 없기 때문에 쉽게 구타하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식입니다. 내적인 힘, 즉 참을성과 인내가 있고 참된 신심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고, 하느님의 거룩한 정의에 모든 것을 맡길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외적으로 자신의 힘을 표출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사람에게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1. 의인에게 있어서 인자함이라는 덕의 발전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의 실현을 당장에 성급하게 하지 않는 것은 먼저 의인에게 있어서는 그들도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의인의 내면의 '사랑'이 더욱 커져서 심지어는 죄인들에게마저도 그 인자함을 펼칠 수 있기 위함입니다. 2. 죄인에게 있어서 회개의 기회 하느님은 죄인들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대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언제든지 정의를 실현해서 죄인을 멸망으로 몰아 넣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충분히 기다려 주십니다. 그래서 화답송은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