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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이 하는 일 2026년 6월 14일 주일 [(녹) 연중 제1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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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것 2026년 6월 14일 주일 [(녹) 연중 제11주일]

세상에는 여러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에는 깊이가 있어서 정말 피상적인 관계도 있고 심오한 관계도 있습니다. 또 누구와 관계를 맺게 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어릴 때 유명 가수를 좋아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일방적이고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요.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저 미숙한 시절의 열정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세상적인 유명세를 지니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내적 가치 중에서 존경할 만한 부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식별이 점점 커져 가면서 저는 분별력 있게 관계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관계 가운데에는 정말 피상적으로 유지되는 관계도 있고 심도 있게 나아가는 관계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는 관계에 불과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내면의 진실성과 선함으로 인해서 깊은 우정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는 특성을 가진 사제라는 직분은 이런 저의 능력을 충분히 발달시켜 주었고 저는 이제 어느정도 식별이 가능합니다. 누가 그의 내면 속에 어둠을 품고 있는지, 누가 보석을 감추고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감출 수 없고 결국 그의 말과 행동, 표정,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로 열매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하는 분에 대한 인식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하더라도 '한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근원적인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어떤 좋은 가치가 있다면 사실 그 원래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 가치를 선물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선과 의로움은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 그분에게 특별한...

안식과 멍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모순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당신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개가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 것일까요?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쉽게 해석됩니다. 우리는 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쉰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휴식, 육체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안식도 그저 단순한 '쉼'으로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안식, 평화, 안녕과 같은 말들은 바로 '영혼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 머무르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빠가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쉬면 직장도 나가지 말아야 하고 자녀들에 대한 돌봄도 멈추어야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쉬고 있다고 표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표현을 바탕으로 아빠가 쉰다는 것은 아빠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루어내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에는 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기 위한 충실한 배움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냉담자'라고 표현하다가 최근에는 그 표현이 좀 심하다 느껴졌는지 '쉬는 교우'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더 큰 영적 어둠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서 아버지를 떠나갔...

단순하고 복잡한 사도직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꽤나 단순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거창한 병원을 세우지도 복잡한 규율을 가진 학교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전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신앙을 주변에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을 살아야 다른 이들에게 그 신앙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부터 신앙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안에 충만한 신앙을 타인에게도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더할나위 없이 복잡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본질에서 갈수록 멀어져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는 껍데기를 신경쓰느라 찐빵 안에 팥이 들었는지 바퀴벌레가 들었는지 거의 신경쓰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행정기관처럼 변해 버렸고 사람들은 복음의 열의 없이 살아가고 그것을 전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가정 안에서도 복음의 빛이 전달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은 여전히 단순합니다. 마치 빛이 밝고 직진성을 지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환경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빛을 '산란'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질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몇 가지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기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기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기 마귀들을 쫓아내기 이 네 가지 사안은 '영적인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는 이 일이 실제로도 일어났습니다. 그의 내면의 영이 치유되는 순간 그 결과가 외견으로도 표현되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다 영적이고 내적인 면모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영혼에 질병...

양육

자녀는 어떻게 키울까요? 일단은 그 몸을 성장시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DNA가 담긴 씨앗들이 자녀의 몸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먼저는 엄마 뱃속에서 그리고 태어나서부터는 음식으로 몸이 성장합니다. 그저 성장만 시키는 게 대수는 아닙니다. 건강하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흔히 자녀의 건강 문제를 앞에 두고 노심초사 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녀에게서 몸만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서 그 내면에 이성과 감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성을 성장 시키고 나아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영화도 보고 하면서 감성도 챙겨야 합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아는 게 없는 무지한 상태이거나 감정이 메말라 있는 아이들을 두고 우리는 '미숙하다'고 표현합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아는 부분이고 알아서들 잘 챙기는 부분입니다. 혹시나 자신의 자녀가 미숙한 취급을 받을까 싶어, 사회에서 도태될까 싶어 열심히 챙깁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영역입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영혼이 존재합니다. 이 영혼은 부모가 낳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키우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혼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된 것입니다.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은 초월적인 양식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안에서 이 영혼의 양식을 두고 '은총'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빛을 비추고 영혼을 '거룩한 진리' 안에서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미사에 나오고 성사생활을 합니다. 또한 이 미사, 즉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외적인 행위가 자동으로 영혼을 성장시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을 '마음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물을 먹지는 않더라도 물가에는 데리고 올 수 있습...

생명의 음식

낚시하는 사람이 떡밥을 뿌리는 것은 고기들이 모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떡밥 자체의 가치에 매달려 있다면 낚시꾼은 아까워서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물고기이기 때문에 기꺼이 떡밥을 희생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하신 것으로 처음부터 기꺼이 선물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의 것을 추수해서 당신에게 돌려드리기를 바라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낚시꾼에게 떡밥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이 영혼이 돌아오게 하려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험’을 하십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이 그분께로 향해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려고 하느님은 우리를 부족하게 만들고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런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게 매달려 있는지 아닌지 당신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다른 한 편, 우리는 구원을 찾아 이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미사에서 이 구원이신 분을 마주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음식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먹고 마십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음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실까요? 그저 입으로 씹어 삼기는 밀떡 조각이 전부인 것일까요? 아니면 달리 그 음식을 먹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

아버지를 보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마치 하늘에서 쨍 하니 빛이 나고 하느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식으로 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보고 믿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례로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에 얼마나 겸손함이 있고 감사함이 자리잡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무언가를 선물했을 때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아주 작은 정성에도 감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 비싼 것을 주어야만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내면을 '본' 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보기를 바라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시적인 것에 현혹되지 말고 한 사람의 진실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흔히 사기꾼들은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감추기 위해서 겉을 꾸미고 다닙니다. 다단계를 하는 사람들은 결코 후줄근하게 다니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이 성공한 사업가인양 외견을 꾸미고 다닙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고 그들에게 원치 않는 물건을 팔아치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솔한 사람은 외견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진실성을 봅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참된 사람인지, 얼마나 신심이 깊은 사람인지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외견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를 보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지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보게 될 것이고 저는 여러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의 교육이 보입니다. 작은 것을 선물해 주었을 때에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