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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가장 기초적인 유혹

그것은 빵을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빵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영적인 영역을 희생해서 빵을 얻는 데 힘을 쏟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의 시대에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 가운데 하나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뒤로 갈수록 단계를 높여 가는데 사실 우리는 그 첫 단계부터 전혀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풍족하지만 반대로 너무나 영적으로 공허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현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을 도외시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헌데 굉장히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못 살 때에는 더한 열심으로 하느님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휴가를 가서 귀찮다고 근처 성당을 알아보지도 않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럼 없이 다음주에 와서 주일 미사를 빠졌다고 너무나 쉽게 고해를 합니다. 결국 외부적인 요인이 문제라기 보다 내면의 문제인 것입니다. 현대는 더 많은 이들이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의 현실을 보거나 사회의 현실을 보아도 무언가 건강하지 않은 모습들이 너무나 쉽게 발견됩니다. 이 모든 현실의 첫번째 원인은 빵을 만들려고, 세상의 것들을 위해 영혼의 영역을 희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까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사실 사람은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즉, 돈이 많아서 그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지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는 내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내면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가장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냅니다. 반대로 내면의 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어 주더라도 망가뜨리고 맙니다. 사실 악마의 유혹은 이뿐만이 아니라 더욱 교묘하고 영악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어떤 눈이 열리고 어떤 눈이 닫혔나?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느님 앞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걱정이 없었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바로 하느님이 시키는 게 있는데 그걸 그대로 하는 게 맞는가? 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유혹에 먼저 걸려 들었고 이어 남자에게도 그 유혹은 전염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 '눈이 열렸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살펴볼 게 있습니다. 어떤 눈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럼 그들이 전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에는 '눈'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린 눈은 세속에 대한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 각자가 하느님과의 유대 없이 각자의 삶을 책임지는 길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욕을 하면서 우리 몸을 보는데 부끄러움을 느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나 자신의 몸을 쳐다보면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 나아가 하느님의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죄를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서도 멀어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타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맑은 영혼은 하느님 앞에 가릴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아시고 그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거침없이 하느님께 열어 보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해소 안에서도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자신의 남은 자존심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 사순시기의 첫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쪼록 고해를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사순의 시작에 고해를 보...

착한 것과 착해 보이려는 것의 차이

착한 사람이 있고 착해 보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은 마치 향수병에서 향기가 나오듯이 착함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옵니다. 내면이 근본 선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선에서 기인하는 일이 됩니다. 반면 착해 보이려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 근본 착하지 않기 때문에 착해 보이는 외적 요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착한 일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애를 써서 억지로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자신의 내면 속에 착함이 머무를 공간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그런 일을 하려고 해도 착함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도 됩니다. 비가 올 때 물이 고이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낮은 곳입니다. 높은 곳에는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억지로 물을 모아다가 높은 곳에 쏟아내면 자연스럽게 그 물은 낮은 곳으로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비처럼 내리는 것입니다. 그걸 억지로 끌어모아 누군가에게 쏟아붓는다고 그것이 그에게 모두 전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게 만들지 않는 이상 드높아진 영역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머무르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한 활동을 착하지 않은 사람이 따라 한다고 착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착한 내면을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뒤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선함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우리가 착해지는 그 첫번째 여정은 바로 화답송에 나오는 것처럼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부숴뜨릴 때에 비로오 선의 시작을 마련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순간부터 은총은 알아서 길을 찾아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

어제 한 젊은 친구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우리의 앞길도 다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하느님은 우리의 앞길을 모두 알고 계셔.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어. 선택을 하고 난 이후에 그 여정이 어디로 가 닿을지 하느님은 아시지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어.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고자 애를 쓰시겠니? 만약에 우리에게 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일이 다 결정되어 있는 거라면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도 없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텐데 말야.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이 열려있어." 그래서 오늘 1독서 안에는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줍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힘 있는 자들의 배척을 당하는 길이고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반대의 길이 좋다고 세뇌를 시킵니다. 십자가는 최대한 버리고 힘 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은 정반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먼저 가신 그 길을 걸어야 하고 우리 스스로를 버리고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에게 길을 바꾸라고, 다른 표현으로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지는 지상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의 가장 기초적인 메시지는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혼의 주머니

구멍난 바지 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는 친구는 멍청한 친구입니다. 그 구멍으로 사탕이 줄줄 새어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구멍이 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 몇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보이기 위한 선행 우리가 선행을 하고 나서는 곧잘 그 선행을 광고하고 다니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영혼에 구멍을 내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의 그 허영이 영혼에 구멍을 내고 나면 선행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된 좋은 것들이 영혼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 빠져나가 버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 허영의 구멍으로 들어와서는 안될 것도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빠져듭니다. 자신이 한 작은 선한 일이 충분히 자신의 좋은 습관으로 굳어지기도 전에 그것을 모조리 다 까발려 버립니다. 결국 그가 한 선행은 온데간데 없고 그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얻고자 한 것 뿐입니다. 2. 드러내는 기도 기도를 하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보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람들이 보란듯이 의도적으로 공공연히 자신의 신심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또한 영혼에 구멍을 뚫고는 그 영혼에 성스러움을 채우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사탄이 즐겨 듣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영을 채워줄 다른 요소들로 그들을 이끌어갑니다. 이런 이들은 곧잘 자신이 성녀라도 되는 듯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스러움을 알리고자 애를 쓰고 곧잘 예언자의 흉내를 내어서 사람들을 꼬시려고 애를 씁니다. 사실 이런 이들은 거룩한 이들이 아니라 고약한 이들입니다. 영적으로 굉장히 교만하고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데 성당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헷갈려 합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는 성당에서 추구해야 할 거룩한 행동을 너무나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식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들이 요란한 깡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기도하는 이에게서 보이는 평화와 기쁨이 ...

주도권 다툼

다툼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사실 그건 우리 사람쪽에서 바라보는 관점일 뿐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전해지는 바는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2독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권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넓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소유한 것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움직임은 돈에 대한 추구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 돈을 뒤쫓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성당에 좋은 신앙 강좌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광고 문구를 '서울에서 회당 백만원씩 하는 강좌를 이곳에서 무료로 전해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실제로 오는 사람마다 10만원씩만 주더라도 사람들은 좋다고 모여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쥐어 보려고 아둥바둥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우리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멀리 도망가려고 하면 할 수록 죽음은 더울 우리를 치열하게 뒤쫓아오고 결국 하나씩 둘씩 세상에서 사라져 갑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잘난 이도 못난 이도 모두 죽음을 이겨내지는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바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우리를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어떻게든 늘려 보려는 수명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려는 전혀 다른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전혀 다른 생명, 주님은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