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신앙인의 맛

최근 글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곳에 기꺼이 투자합니다. 나에게 무언가 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은 그 이득을 '자본'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사기꾼들이 득세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겠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이고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생을 한탄하며 살거나 심할 때에는 목숨까지 내다버리곤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이득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여기서 잠깐 검토해 봅시다. 위의 모든 것은 나의 고유한 것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닙니까? 내 양식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 내 공간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옷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시간과 노력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은 모두 나에게 존재하는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에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 설명됩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우리가 나의 것으로 부족한 이들을 채워 줄 때에 그것은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빛을 증가시키고, 나의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며, 의로움이 나의 길을 이끌게 되고, 주님의 영광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큰 이득은 우리가 부르실 때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

어디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우리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그는 꿈꾸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설령 자신에게서 완성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을 지니고 거룩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꿈꾸는 사람들이고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부와 권위도 그의 어두운 마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강박적으로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죄는 그렇게 사람을 옭아매고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처음부터 죄가 심각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마치 미끄러운 내리막처럼 죄는 서서히 한 사람을 더 큰 어둠으로, 더 큰 어둠으로 서서히 내려가게 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죄악을 심심찮게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헤로데는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할 기회,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싶은 기회를 노렸을 뿐이고, 헤로디아라는 악녀는 그의 허영과 교만을 이용해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되었고 남은 평생을 그 죄책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갈까요? 거룩한 희망일까요? 아니면 갈수록 깊어지는 죄악의 어둠일까요? 깊이 묵상하고 회개하고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쉬운 신앙생활?

다윗은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그리고는 그 내용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왜냐하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의 길을 걷고 그분이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쉬운 길을 걷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쉽게 느껴지다가도 나중에는 어려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지킨다는 것은 이 세상이 가르치고 이끄는 방향에 꾸준히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쉬운 게 아닙니다. 복음에서도 같은 상황이 묘사됩니다. 우리는 감상젖은 복음 선포를 꿈꿉니다. 마치 영화 미션에 나오듯이 가운데 앉아서 악기 하나만 불면 자동으로 사람들이 다가와서 신자가 되는 식입니다. 그러나 실제 선교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영화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교는 싫다는 사람에게 다가서다가 거절도 당하는 법이고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싫다는 이유로 욕을 먹기도 합니다. 부모가 가진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해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 수중에 있을 때나 아이들이지 철들고 나면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본당에서 신자들을 사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마음 상하는 일이 있거나 기분나쁜 일이 생기면 돌아서서 뒷담화 하는 것을 우습게 아는 세상에서 사제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일어날 일을 바탕으로 여지를 남겨 두십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우...

행복의 다른 기준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에게 규정하는 기준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행복해지는 방법'은 따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세상 안에서 성공하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그걸 추구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고 이뻐지고 싶어하고 유명해지고 싶어하고 권력을 쥐고 싶어합니다. 그게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더욱더 메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행복의 기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딴세상 말씀 같습니다. 가난한데 어찌 행복할 것이며 슬퍼하는데 어찌 행복할 것입니까? 만일 누군가가 인스타그램에 후줄근한 옷을 입고 맨날 펑펑 우는 모습을 올리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정말 말도 안되는 구절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우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믿겠습니까? 아예 듣기조차 거북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 맞는 걸까? 혹시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진리가 있지는 않을까?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그저 '신앙'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을 정말 보기를 원하고 배우기를 원해야 비로소 신자가 됩니다. 그저 성당을 다닌다고 미사 때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에 신자, 즉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

우리는 가난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표현들을 듣고 있자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가난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가련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 남들이 무시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가난과 가련함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그저 돈이 없는 가난을 말하고 처참한 몰골의 가련함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에 피신한다'라는 개념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이들입니다. 나아가 그들의 특성이 앞서 서술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찾는 이들이고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겸손한 이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백성의 가난함과 가련함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해서 가난함을 느끼고 하느님 앞에서 지극히 낮은 존재로서 살아가기에 가련한 이들입니다. 설령 그들이 세상의 모든 부를 쥐고 있더라도 그들은 하느님이 없이는 가난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어도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기자신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난과 가련함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실질적인 부가 있거나 없거나 그것은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가 있다면 그 부를 가지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이고 없으면 없는대로 딱히 욕심내지 않고 필요한 것을 찾으며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이들입니다. 또한 그들의 가련함은 그저 자신을 낮추기만 하는 가련함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련함은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실행합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오히려 그...

예수님의 첫 선포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죄에서 돌아서라는 회개의 메세지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올바른 목적지를 선포하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신앙생활은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만일 신앙 안에서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수영장에 가서 등산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신앙이라는 것, 즉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보이는 대상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확인하면 그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약속된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에 목마른 자들에게 선포됩니다. 신앙은 죄에 억눌려 본 이들, 세상의 어두움에 시달려 본 이들에게 선물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 안의 어떤 대상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원으로부터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가득 찬 방을 치우지도 않고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손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과제는 ‘회개’가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비워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탐욕과 이기심, 시기심과 증오, 원한과 분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빛이신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길을 나서면 방향을 올바로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과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길을 나서면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차를 운전한다면서 목적지도 정해놓지 않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올바른 목적지를 뚜렷이 하고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