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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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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무엇에 목마르신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르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그분의 육체적 필요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만일 그분이 육체적 필요를 뒤쫓아 다니실 것 같았다면 애시당초 십자가 위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감과 적개심, 살인 의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리 알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목마름은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연히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화 중에 자꾸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생수를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목마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갈증을 채우는 물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물을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서 달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그 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결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온갖 기적을 하시는 분이 그저 그에게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목말랐던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육체의 식량을 가져오고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믿게 데려옵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목마를까요? 저마다 목마른 것을 찾게 마련이고 그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목마르지 않은 이를 아무리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아 본들 그는 결국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목마른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 놓아도 결국 하느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오다

광야에서 물을 얻을 수 없고, 더군다나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상식입니다. 모세는 사실 양측에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 말이 안되는 요구 앞에서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더 힘을 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위를 쳤고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순응하는 이는 그 열매를 얻게 됩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일이 이루어집니다. 본당에 나와보면 여러가지 현실들이 보입니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수십년간 쌓여 온 그곳 만의 고유한 어려움들을 해결할 가능성은 0퍼센트에 수렴합니다. 헌데 하느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바위'에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그 바위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바위는 물을 꺼낼 수 없습니다. 바위 안에는 내어줄 수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일이라면 가능합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황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축이고 그들 앞에 하느님께서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야말로 '광야'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목말라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적 갈증을 채워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제들은 바위 같습니다. 더이상 나올 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위태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하느님 앞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이 직분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러면 그 순간 물이, 생명의 물이 그에게서 터져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분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를 찾아 다닐 것입니다. 교회는 이 메마른 광야의 시대에서 바위를 쳐서 사람들에게...

제정신이 들다

둘째 아들은 이미 이 순간부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다만 그의 현실은 아버지의 집 밖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때부터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이 순간부터 아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가 다가오기 시작하는 순간에 오히려 그에게 달려갑니다. 그가 제정신이 들기 전에는 그를 붙잡아 본들, 그에게 달려가 본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떠나는 그를 말리지도 않았고 멀리 있을 때에 방문하지도 않습니다. 제정신이 들기 전의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죽었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첫째가 문제입니다. 그가 '화를 내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아버지 밑에서 '종처럼' 일하는 자신을 돌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를 타이릅니다. 첫째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선물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것이 부당하다 생각하며 자신들이 예수님을 보낸 하느님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줍니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건 그들의 몫입니다. 

최후의 시험

보통 시험은 준비기간 동안 잔뜩 준비하고 막상 시험 당일에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특히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 평가를 세상의 시험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의 장면은 그 안에 숨어 있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시험은 마지막에 선한일의 숫자와 악한일의 숫자를 더하고 빼서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셈이고 우리는 그 심판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개념입니다. 즉 시험 당일에 컨디션이 좋아서 찍기를 잘 해서 성적을 급격히 올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살아가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해 오는 일이 우리의 심판을 결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심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 자, 이제 이미 출제된 이 문제를 검토해 봅시다. 작은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돈의 양을 따지고 들거나 생활 수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작은 이를 말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외된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작은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음의 기준은 여러 면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돈을 필요로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당신의 시간을, 당신의 노력을, 당신의 신앙 선포를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친구 가운데에서 여러모로 풍족하나 아직 신앙이 없는 친구가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좋은 친구인데 아직 그 누구도 그에게 성당을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앙이라는 보화를 선물해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인데 우리는 그를 굶주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급한 양심의 불을 끄기 위해서 가난한 이에게 돈 몇 푼을 쥐어 주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에게 그...

악마의 가장 기초적인 유혹

그것은 빵을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빵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영적인 영역을 희생해서 빵을 얻는 데 힘을 쏟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의 시대에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 가운데 하나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뒤로 갈수록 단계를 높여 가는데 사실 우리는 그 첫 단계부터 전혀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풍족하지만 반대로 너무나 영적으로 공허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현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을 도외시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헌데 굉장히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못 살 때에는 더한 열심으로 하느님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휴가를 가서 귀찮다고 근처 성당을 알아보지도 않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럼 없이 다음주에 와서 주일 미사를 빠졌다고 너무나 쉽게 고해를 합니다. 결국 외부적인 요인이 문제라기 보다 내면의 문제인 것입니다. 현대는 더 많은 이들이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의 현실을 보거나 사회의 현실을 보아도 무언가 건강하지 않은 모습들이 너무나 쉽게 발견됩니다. 이 모든 현실의 첫번째 원인은 빵을 만들려고, 세상의 것들을 위해 영혼의 영역을 희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까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사실 사람은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즉, 돈이 많아서 그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지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는 내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내면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가장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냅니다. 반대로 내면의 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어 주더라도 망가뜨리고 맙니다. 사실 악마의 유혹은 이뿐만이 아니라 더욱 교묘하고 영악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어떤 눈이 열리고 어떤 눈이 닫혔나?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느님 앞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걱정이 없었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바로 하느님이 시키는 게 있는데 그걸 그대로 하는 게 맞는가? 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유혹에 먼저 걸려 들었고 이어 남자에게도 그 유혹은 전염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 '눈이 열렸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살펴볼 게 있습니다. 어떤 눈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럼 그들이 전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에는 '눈'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린 눈은 세속에 대한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 각자가 하느님과의 유대 없이 각자의 삶을 책임지는 길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욕을 하면서 우리 몸을 보는데 부끄러움을 느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나 자신의 몸을 쳐다보면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 나아가 하느님의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죄를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서도 멀어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타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맑은 영혼은 하느님 앞에 가릴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아시고 그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거침없이 하느님께 열어 보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해소 안에서도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자신의 남은 자존심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 사순시기의 첫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쪼록 고해를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사순의 시작에 고해를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