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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과 가라지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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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우리는 '힘'이라고 하면 외적인 힘만을 생각합니다. 즉, 돈의 위력이나 권력과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내적인 힘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외적인 힘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즉, 인내가 없기 때문에 쉽게 구타하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식입니다. 내적인 힘, 즉 참을성과 인내가 있고 참된 신심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고, 하느님의 거룩한 정의에 모든 것을 맡길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외적으로 자신의 힘을 표출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사람에게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1. 의인에게 있어서 인자함이라는 덕의 발전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의 실현을 당장에 성급하게 하지 않는 것은 먼저 의인에게 있어서는 그들도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의인의 내면의 '사랑'이 더욱 커져서 심지어는 죄인들에게마저도 그 인자함을 펼칠 수 있기 위함입니다. 2. 죄인에게 있어서 회개의 기회 하느님은 죄인들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대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언제든지 정의를 실현해서 죄인을 멸망으로 몰아 넣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충분히 기다려 주십니다. 그래서 화답송은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보는 데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벌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내면 속에 벌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에게는 침이 있고 그 침에 쏘이면 심하게 아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는 벌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벌이라는 것은 작고 이쁜 날라다니는 것이지만 어른에게는 벌이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신앙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유롭게 선물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내면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긴가민가한 대상입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배를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배고픔 또는 쾌락은 확실한 표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배고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고 나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떻게든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작용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뜻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멀리 이민간 아빠라서 지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 아빠가 한 약속을 철썩같이 믿는 아이는 훗날 아빠가 돌아올 때에 그 약속에 상응하는 응답을 얻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을 선물해 주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가운데에는 얼른 이 미사를 마치고 내 입에 들어올 음식이나 내가 만날 사람, 내가 할 일, 내가 벌어들일 돈에 대한 염려가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성경이 말하듯...

나의 말은 완수될 것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한 사람의 말은 그 당사자의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지 아닌지는 얼마나 멋들어지고 정교한 말로 표현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실행할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초등학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하는 것과 실제 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의대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가 강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때로는 장애물에 가로막히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들으면 때로 반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불합리해 보이고 불완전해 보이고 심지어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악한 이들이 선한 이들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가는데 의인들은 고통당하기만 하고 아무리 하느님께 부르짖어도 하느님은 들은 척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우리의 한계는 우리가 오직 눈에 보이는 영역에서만 답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일생이라는 시간적 한계 속에서만 결과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을 내릴 이유도 없고 조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을 쥐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 안에서 당신의 섭리대로 일을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계란 후라이를 하기 위해서 계란을 깨는 순간에 누군가 와서 '아! 아직도 계란 후라이가 안되었어?!'라고 한다면 정말 이상한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라이팬이 달궈져야 하고 기름을 둘러야 하고 그리고 익히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갓 시작한 요리를 두고 왜 완성이 되지 않았느냐고 따져봐야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느님은...

마땅한 사람을 찾는 법 2026년 7월 9일 목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1독서에는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특히나 다음의 구절이 절절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호세 11,4) 우리는 하느님을 막연히 먼 분으로,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있고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충실한 외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할 사도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파견에 앞서 지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을로 가야 하고 마땅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찾아가실 때에 사람을 찾는 법이 잠깐 등장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사무 16,7)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도들 역시도 사람들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사실 마음으로 찾은 그 마땅한 사람을 통해서 일이 진행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뜻 세상을 돌아보면 많은 돈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일을 합니다. 목마른 마음이 영혼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이 기쁨을 표현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찾아오지 않고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드시 찾아갑니다. 의지가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서라도 위대한 일을 해내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놓여 있어도 모든 것을 허비해 버리고 맙니다. 복음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을 자신의 가까이 두는 것은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돈을 주거나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빌어 줍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수용자에 따라서...

우리가 가야할 길

다른 민족들의 길 세속성을 상징합니다. 세속에 속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열렬히 추구하는 상태, 즉 돈과 권력과 명예를 최종 목적지로 두고 추구하는 상태입니다. 그럼 우리 신앙인과는 상관이 없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앙인도 그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근본 선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신앙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 같지만 근본에는 세속에 대한 추구를 언제나 하느님 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신앙을 자신의 삶을 꾸며주는 하나의 생활로 치부하고 생의 위기가 다가오면 언제든지 멀리하고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지금의 자녀 세대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소위 '먹고 산다는 핑계'를 앞세워 신앙을 소홀히 하는 이들과 그것을 두둔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고을 원래는 한 형제였는데 건전한 신앙에서 갈라져 나간 이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SSPX라는 성 비오 10세회라는 전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교를 임명하면서 최종적으로 가톨릭과 결별을 완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하나의 단편일 뿐 수많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계 치유라던지, 하느님의 뜻 영성이라던지 교회 안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왜곡하는 수많은 경향들이 존재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인간 내면의 교묘한 영적 자만이나 교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 스스로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거나 반대로 한 사람을 지나치게 죄스럽게 느끼게 하여 영적 구속 상태에 빠지게 하는 등입니다. 특정 신심에 지나치게 빠지거나 이교적인 가르침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면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이들은 가장 깊은 내면에 영원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인도자가 없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도 있고 교회 밖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본당에서 신부님이 강론 중에 내내 정치 이야기만...

황사영 백서 (한글)

황사영 백서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길 떠났던 사람 편에 각하께서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세월이 지나 벌써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각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덕화가 나날이 융성하시기에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하례 드리는 마음 이기지 못할 듯 합니다. 저희 죄인들은 죄와 악이 깊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헤아림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에게 미치게 하였습니다. 저희 죄인들은 또한 위태로움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면목으로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겠습니까? 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성교가 뒤집혀 엎어질 위험이 있고, 백성이 박해에 걸려 죽을 고통 속에 있는데도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할 데도 없으며, 어진 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모든 것을 헤아려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은혜로운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극한 괴로움에 저희는 장차 누구를 불러야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지 이미 오래고 실마리가 하도 많아서 간단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으므로 다음에 자세히 적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했고, 요한도 들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