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무엇을 믿어야 할까?

최근 글

모두 저마다의 길로 간다

우리는 저마다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마냥 다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작게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부터 이 일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함께 이득을 얻기를 바라기에 회사가 잘 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 일을 합니다. 나아가 이런 방향은 정치색으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이상에 따라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고 그 길을 함께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영혼의 결, 또는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길과는 다르게 영혼의 방향은 오직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하느님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견대로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영혼을 이끌어야 하는 소명을 지닌 이들이 저마다의 인간적 약점으로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은 의외로 뚜렷하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스승을 따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만나를 먹은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아닌 세속적인 이상을 뒤따른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질 것입니다. 그릇된 길을 스스로 선택한 탓입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오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 저마다의 보속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필리포스와 내시는 같은 뱡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들은 마치 소금이 물에 녹듯이 서로를 만나 알아보고 신앙의 정수를 빨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바라는 것을 얻는 법입니다. 신앙을 정말 배우고 싶은 신앙인은 사제에게서 거룩함을 찾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욕구가 가득한 신앙인은 사제를 이끌어 술을 배우게 만들고 도박을 하게 만들고 고급 스포츠를 즐기게 이끌어 버립니다. 그리고서는 마치 자신이 그 사제에게 좋은 것...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근본 '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죄일까요? 사실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러 이러한 것이 죄라고 하니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주일 미사 빠지면 죄라고 하니 그게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죄의 근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라고 생각하고 죄가 아닌 것도 죄라고 생각하는 셈이지요. 빛과 어둠을 가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태양은 빛입니다. 반대로 태양이 사라지면 어둠이 시작되지요. 하지만 이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전등불이 들어와 빛이 비치면 이건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태양보다 어두우니 어둠이 될 수도 있고 밤보다 밝으니 빛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복잡합니다. 원래는 복잡하지 않은데 인간이 복잡한지라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십니다. 이는 신앙인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명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선한 분은 아버지 한 분 뿐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 10,18) 그렇다면 선은 분명합니다. 선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선'은 하느님께 다가서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반대의 방향과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모두 죄스런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방향성과 움직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들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분류하는 '죄인들'보다 상당히 우위를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 생활 속에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극단적으로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에게로 다가서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기에서는 답이 갈립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극단적으로 고수하려고 드는 율법의 형식 속에서 하느님이 의도하는 것에서 도로 멀어질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일은 ...

요셉에게 일어난 일

요셉에게 일어난 일을 구조화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합리한 상황 - 거룩한 지시 - 믿음의 수락 먼저는 불합리한 상황이 생겨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합리한 일들도 있고 말도 안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신앙'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의 범주 안에서 할 일이면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 역시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는 '파혼'이라는 정상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요셉의 좋은 성정대로 그 파혼을 '남 모르게' 준비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요셉이 다루어야 하는 일은 정상적인 범주의 일을 벗어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내면에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거룩한 지시가 등장합니다. 요셉에게는 그것이 꿈이라는 수단으로 주어졌지만 꿈이라는 수단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범주에서는 교회나 영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믿어야 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이의 거룩한 명령을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 거룩한 지시를 무시합니다. 그건 오늘날 교회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거룩한 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코미디언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의 근원적인 행방의 문제를 교회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믿음으로 수락합니다. 복음은 이를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순종, 순명은 대표적인 믿음의 수락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수도자들도 장상에게 순명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대인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거부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은 모두 스스로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순명...

기적과 세속성

기적은 거룩한 신심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기적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으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이의 내면에 흐르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기적은 '아무에게나' 보란듯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예수님에게 표징을 달라고 떼를 쓰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 말고는 없을 것이라고 하셨고 반면 제자들은 따로 데리고 가서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신다. 세속화된 세상에 기적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이는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자신을 드러내기를 더욱 조심한다는 말이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그 기적을 체험할 만한 신심 속에서 신중함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신기한 체험을 떠벌리고 저마다의 세속성으로 난도질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하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만 함구령을 지켜 나간다. 기적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을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겸손하고 낮추인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비가 와서 낮은 곳으로 흘러들듯이 기적은 그 낮고 겸허한 영혼을 향해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한 이는 말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그 기적에 대한 응답을 증거한다. 세속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고쳐 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는 이들의 범위는 당신이 사는 영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영역에 고착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얼마든지 외부에서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영역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예언자는 꼴사나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영역을 넘나듭니다. 그런 가운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 예언자는 자신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것을 베풀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나아가 예언자는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지 동네의 유지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모습들 중에 하느님에게서 어긋나는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죽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로 예언자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처럼 느낍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오던 일들을 예언자가 막아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자를 죽였고 죽이려 들고 죽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하느님의 비호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순간까지, 그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자신이 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벼랑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납니다. 저 역시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밀어붙였고 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사목을 계속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허락하실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까지 묵묵히 제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믿는 이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되었고, 엘리사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파견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서 구원의 표지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납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목마르신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르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그분의 육체적 필요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만일 그분이 육체적 필요를 뒤쫓아 다니실 것 같았다면 애시당초 십자가 위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감과 적개심, 살인 의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리 알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목마름은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연히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화 중에 자꾸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생수를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목마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갈증을 채우는 물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물을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서 달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그 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결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온갖 기적을 하시는 분이 그저 그에게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목말랐던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육체의 식량을 가져오고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믿게 데려옵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목마를까요? 저마다 목마른 것을 찾게 마련이고 그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목마르지 않은 이를 아무리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아 본들 그는 결국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목마른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 놓아도 결국 하느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