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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 용서 2026년 9월 13일 주일 [(녹) 연중 제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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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들이 살아나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는 상상하면 끔찍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뼈로 가득찬 계곡입니다. 모르긴 해도 과거에는 이런 장면들이 간간이 보였을 것입니다. 전쟁이나 역병으로 사람들이 떼로 죽어나가면 그런 이들을 모아다가 구렁에다 던져 넣곤 했겠지요. 그러면 훗날에 그곳에는 뼈만 가득한 죽음의 계곡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즉,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뼈만 가득한 곳, 그것이 신심이 메마르다 못해 뼈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과거의 생기가 하나도 없이 늙고 병들어 있는 교회들, 젊은이들은 모조리 떠나버리고 그나마 있던 의욕들마저 메말라가고 뭘 해도 안된다는 죽은 사고만 가득히 팽배해 있는 곳, 바로 뼈로 뒤덮인 계곡과 같은 신앙의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참으로 도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될 리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안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언뜻 자연스러운 대답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 하느님에게 희망을 두는 대답입니다. 그의 답변 속에는 그 질문을 하시는 분에 대한 능력에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된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 당신이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안될 일이면 하느님이 아예 묻지도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보기에도 안되는 일이면 안되는 것이니 애시당초 물어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당신이 묻는 이유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헌데 하느님은 당신이 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을 '예언...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어찌보면 하느님은 꾸준하십니다. 당신의 뜻은 복잡하지 않고 굉장히 뚜렷하고 또 항구합니다. 그건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천주교를 흔히 ‘얌전한 종교’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사실 천주교가 얌전한 종교처럼 보이는 시절은 현대에 들어와서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에 천주교는 성가시고 유별난 종교, 즉 선교하는 공동체였고 사람들을 모으는 종교였습니다. 사도행전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가톨릭 교회가 얌전하다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부과되는 선교라는 뚜렷한 사명에서 도망가고 싶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사실 우리 성당 자체가 선교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당 옆에 세워놓은 김보록 신부님은 프랑스 사람이고 그 머나먼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온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처럼 프랑스 교회가 고상한 척을 하고 얌전만 떨었다면, 흔히 하는 말처럼  지금의 우리 성당 자체가, 아니 우리 한국 가톨릭 교회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신앙에 함몰되어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누리는 신앙의 편안함이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떠나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오늘 미사를 마치면서도 우리는 또 한 번 들을 것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대답하겠지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간단히 말하면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행복을 꾸린다는 구상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공식처럼 보입니다. 많은 돈이 곧 많은 행복의 근거가 된다고 착각하지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는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은 성모님에게 '믿으셨기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믿음이 행복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실 사람들은 쾌락과 행복을 착각합니다. 돈은 우리에게 쾌락을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행복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참된 행복은 외부에서 밀려드는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행복은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충실할 때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행복합니다. 물고기를 바깥에 꺼내 놓으면 너무 힘들어 할 것이 뻔 합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행복합니다. 원숭이를 물 속에 억지로 집어 넣으면 죽고 맙니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곳에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뜻 안에 올바로 머물러 있을 때에 행복합니다. 성모님은 그 행복의 비결을 아셨고 그래서 행복한 분이십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만 이해되는 이야기

오늘 복음은 반만 잘라내면 완벽하게 우리의 일상과 맞아 떨어집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앞부분, 즉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부분만 없앨 수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가 늘 하는 짓입니다. 누가 나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지면 그는 반드시 갚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고소 고발도 하고 감옥에도 집어 넣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그렇고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이익을 따지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요구하는 이가 먼저 다른 더 큰 이에게 많은 것을 탕감받은 상태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처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받은 세례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우리는 먼저 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종처럼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망각한 사람처럼 처신한다면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신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두 부류의 신앙인이 나뉩니다. 자신이 먼저 많은 것을 용서받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신앙인과 그렇지 않은 신앙인입니다. 앞선 신앙인들은 일상을 자신에게 허락된 기회로 이해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반대로 후자는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탐욕스러우며 현실적인 이득을 계산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행실대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현세에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내세에서는 가장 정의로우신 분이실 테니까요.

악을 탄식하는 이들

어제 어린이에 대해서 배우면서 하느님의 뜻을 순하게 받아들이는 이라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반대의 케이스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라는 것은 특정 행동의 준수 여부를 가리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에게 가까워지느냐 멀어지느냐를 기준으로 합니다. 죄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성당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의인이 되고 바깥에 머무른다고 해서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가가 더 큰 기준점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점을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우리는 지옥이라는 곳을 상상하기를 그곳에 가기 싫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잔뜩 모인 곳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 지옥은 그들을 잡으려는 선의의 뜻을 모조리 물리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뜻을 완전히 굳힌 상태로 모여든 곳입니다. 즉 그들은 천국에 가기 싫어서 지옥에 모여든 셈입니다. 사실 죄를 짓는 이의 내면은 선한 이들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선한 이들에게는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악인들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선하게 처신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힘든 일이 됩니다. 동네에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자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얼마나 힘겨워할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언제나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누구 흉을 보게 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힘들어 합니다. 1독서는 그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에제 9,4) 성당을 술판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장면을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이면 누군가를 험담하기를 너무나도 즐기는 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그 역겨운 짓을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저마다의 행실로 심판받게 마련입니다.  “...

못마땅하게 여기다

그들이 보려고 하는 것 1. 목수의 아들 사회적 금전적 능력, 지위 2.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출신 배경 3. 그의 형제들 / 누이들 인맥, 관계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예수님이 지니신 거룩한 힘의 출처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 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 남편, 누구 엄마, 누구 딸이라는 식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듣기 힘든 시련으로 작용을 했고 결국 사람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예레미야가 한 일은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려는 시도였고 그들을 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적의 선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소중한 은총의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반복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참된 예언자를 만나면 기뻐하기보다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만일 제가 술을 즐겼다면 술꾼들의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노름판을 좋아했다면 노름꾼들의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을 좋아하고 복음을 좋아하는 이들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