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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의 게시물 표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2026년 6월 21일 주일 [(녹) 연중 제12주일]

우리가 어린 시절 마음이 안정되어 있었던 이유는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고 싶을 때 먹고 싸고 싶을 때 싸면 그만이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시기는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부족했고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첫번째 시기가 다가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와의 유대관계 속에서 벌어집니다. 우리는 부모라는 인격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웁니다. 그 시기에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가치관을 물려 받습니다. 외적이고 화려한 것에 관심이 많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가치관을 물려받아 외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됩니다. 또 돈을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욕구에 눈을 뜨기도 합니다. 반면 진솔하고 참된 것을 올바른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것이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학교를 가게 되고 친구를 만납니다. 그리고 이내 친구와의 유대관계에 빠져듭니다.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가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친구들의 비행에 동참하기도 하고 또 좋은 친구들을 만나 좋은 뜻을 품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친구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어떤 유행을 따르는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제 이 아이는 성장해서 사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이 생겨납니다. 직장에 따라서, 내가 몸담는 문화에 따라서 그들의 시선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내가 어떤 정치색을 가졌는지가 주변 환경에 따라 중요하게 되고 또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도 신경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신앙인은 이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 어느정도 커서 철이 든 뒤부터...

하늘에 보물을 쌓는 법 2026년 6월 19일 금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최근 읽고 있는 책에서 발췌 이 글을 쓰면서 무의미하고 경멸적인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의롭게 생활한 이들을 찬미하고 이 이야기를 듣게 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외모는 수수하지만 거만한 태도를 지닌 동정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부자였지만 이방인이나 동정녀, 교회, 가난한 이들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았습니다. 사부들로부터 여러 차례 질타를 받았으나 그녀는 물질적인 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복된 마카리우스가 이 동정녀의 탐욕을 줄여 보려 했다고 합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집 원장이며 사제인 마카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계책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젊었을 때 보석 세공사로 일했던 그는 그녀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나는 취옥과 풍신자석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 보석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인지 도둑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무척 귀한 것이므로 값을 매길 수 없지만, 오백 금화만 있으면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들을 산다면, 그 가운데 하나만 팔아도 오백 금화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니, 나머지는 당신 조카를 예쁘게 치장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동정녀는 그 말에 넘어가서 “제발 그 보석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마세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마카리우스는 그녀에게 “우리 집에 와서 그것들을 구경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동정녀는 곧장 오백 금화를 내놓으면서 “이 돈을 받으세요. 나는 당신이 그 보석들을 팔려고 내놓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오백 금화를 받아 병원에 기부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높이 존경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며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 살까지 살았고, 우리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동정녀는 그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교회에서 그를 만나자 물었습니다. “제가 오백 금화를 지불한 그 보석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2026년 6월 18일 목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주님의 기도는 저 높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늘이라는 곳은 영혼이 가장 드높이 올라갈 수 있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바로 그 하늘에 계시는 분입니다.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 거룩함에도, 성화에도 한계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원한다면 얼마든지 성화에 더 높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도록 세상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유일한 한계라면 우리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성화의 노력은 그치게 될 테니까요.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시작되게 됩니다. 아버지가 집안에서 신심에 따라 제 역할을 충실히 해 내면 식구들이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고 그 집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 아버지가 진탕 술에 취해 식구들을 괴롭히면 바로 그 곳이 지옥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묵상하고 그 뜻이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이루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그분의 뜻을 올바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를 '현세적 필요'로 해석하는데 물론 하느님은 새들도 먹이시는 분이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용할 양식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하루하루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눈 앞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이 은총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없으면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지니고 있어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조건은 타인을 향한 우리의 용서입니다. 마치 작은 연못에서 물이 빠져나가야 그 빈공간에 새로운 물이 들어찰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2026년 6월 17일 수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니 신심이 없는 사람도 온갖 거룩한 척을 하면 신심이 있는 것처럼 보여 속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의외로 성당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우리 가톨릭은 외양으로 이루어지는 형식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형식을 잘 꿰차고 그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순진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열성이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숨을 일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외견과 동시에 우리의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누가 진실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하는지, 아니면 누가 마음으로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겉꾸민 행동을 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저마다의 행실대로 갚으십니다. 저마다 마음에 품은 생각대로 그리고 거기에서 빚어지는 행실대로 되갚아 주십니다. 거짓과 위선은 그에 상응하는 벌로, 진실함과 겸손은 그에 상응하는 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속기 쉬운 존재라서 멀쩡한 사람을 두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악인을 두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나 신앙 안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것이 성인들의 박해입니다. 성인들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흔히 기존의 틀을 깨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사람들이 안락하게 지내는 가운데 성령의 흐름에 따라 실천하는 하느님의 사람은 그들 눈에 거슬려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모두 당대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바알을 뒤쫓는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기분좋게 해 주는 사람을 찾지 자신들을 진리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싼 칭찬 몇 마디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완전 2026년 6월 16일 화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세상은 두 가지 흐름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는 세속적 계산입니다. 세속적 계산은 눈에 드러나는 것이고 철두철미합니다. 마치 서로간에 부조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네가 나의 결혼식에 와서 10만원을 주었으니 나도 너의 결혼식에 가서 10만원을 주겠다. 네가 내 부모의 장례식에 와서 10만원을 주었으니 나도 너의 부모님 장례식에 가서 10만원을 주겠다. 뭐 이런 식입니다. 세상은 철두철미한 계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손해보는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득이 된다 생각할 때에 계약이 이루어지고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 가운데 10원 한 장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하나가 있으니 이는 '마음의 계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 가는 것에 많은 것을 쏟아 붓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굿즈를 사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후원금을 보내는 것은 거기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얻는 것이 딱히 없지만 우리는 마음 가는 곳에 많은 것을 기꺼이 쏟아 붓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여기에 더해서 또다른 흐름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이라는 영역입니다. 이 은총은 사실 모두 무상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무한하게 선물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도 은총이요, 내가 일할 수 있는 것도 은총이고, 나와 우리 가족이 건강한 것도 은총이고 모두가 은총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떠올릴 때에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거저 받았고 따라서 거저 내 주어야 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세속적 계산에서 철두철미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이 넘쳐 흐르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사랑이 넘쳐 흐르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니 우리도 하느님의 완전함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세상적 논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에게 반항할 때...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2026년 6월 15일 월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 복음은 '악인'에 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모든 보편 상황에 적용되는 규율이 아닙니다. 의인들은 정의롭게 살기 때문에 정의 안에서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면 됩니다. 의인이 천 걸음을 가자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천 걸음을 가면 그걸로 끝입니다. 의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악인은 다릅니다. 악의 의지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작동됩니다. 악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악인은 그 악이 너끈히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선에서는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말도 안되는 지침이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른뺨을 치면 세상의 규율 대로라면 정당 방위로 나도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소송이 존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고소장을 날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복음을 듣는 사람은 사실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누군가 나의 오른뺨을 때리는 데 방어하거나 맞서기는 커녕 도리어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하니 말입니다. 이제는 영적인 현실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악인이 악을 실행할 때에 그에게는 상응하는 '벌'이 준비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가 실행하는 어둠에 똑같은 수준의 어둠으로 맞설 때에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도 벌을 받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그의 악에 '선'으로 맞설 때에 상대는 자신의 악 때문에 벌을 받지만 우리는 우리가 실천한 선의 결과물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선의 결과물은 상급입니다. 하느님은 선한 이에게는 상을 악한 이에게는 벌을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악인과 맞설 때에 그의 악에 선으로 응대하면 하느님은 훗날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마련하실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악인은 자신의 악에 우리가 악으로 맞서기를 기대하겠지만 도리어 선으로 응대하는 것에 수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그 악의 영향에서 멀리 도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일꾼이 하는 일 2026년 6월 14일 주일 [(녹) 연중 제11주일]

일꾼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직무의 이름을 갖고 있다고 일꾼이 되지는 않습니다. 의사가 의사 가운만 입고 명찰만 달고 있다고 의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적절한 의료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필요할 때에 자신의 의료 기술을 펼쳐서 사람을 살려야 의사가 됩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그저 신자라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이어야 신자가 됩니다. 나아가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활동 속에서 목자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합니다. 목자는 더러운 영들을 식별하고 그들을 올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장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그 직무를 잃는 것으로 끝이지만 사목자에게 올바르지 않은 영으로 식별받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나아가 사목자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나아가 목자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악을 품고 자행하는 이들과 그저 병에 걸려서 쓰러지고 허약해진 사람들입니다. 둘에 대한 처우는 상당히 다릅니다. 악은 쫓아내라고 가르치시지만 병자와 허약한 자는 고쳐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이전 강론에서 다룬 적이 있으니 이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사도들을 '파견'합니다. 헌데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엇나간 길을 걷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런 이들은 '교회 밖에' 있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이런 이들이 교회 안에 더 많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른 민족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일도 없고 세속적 욕구가 가득한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것 2026년 6월 14일 주일 [(녹) 연중 제11주일]

세상에는 여러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에는 깊이가 있어서 정말 피상적인 관계도 있고 심오한 관계도 있습니다. 또 누구와 관계를 맺게 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어릴 때 유명 가수를 좋아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일방적이고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요.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저 미숙한 시절의 열정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세상적인 유명세를 지니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내적 가치 중에서 존경할 만한 부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식별이 점점 커져 가면서 저는 분별력 있게 관계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관계 가운데에는 정말 피상적으로 유지되는 관계도 있고 심도 있게 나아가는 관계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는 관계에 불과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내면의 진실성과 선함으로 인해서 깊은 우정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는 특성을 가진 사제라는 직분은 이런 저의 능력을 충분히 발달시켜 주었고 저는 이제 어느정도 식별이 가능합니다. 누가 그의 내면 속에 어둠을 품고 있는지, 누가 보석을 감추고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감출 수 없고 결국 그의 말과 행동, 표정,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로 열매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하는 분에 대한 인식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하더라도 '한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근원적인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어떤 좋은 가치가 있다면 사실 그 원래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 가치를 선물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선과 의로움은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 그분에게 특별한...

안식과 멍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모순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당신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개가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 것일까요?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쉽게 해석됩니다. 우리는 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쉰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휴식, 육체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안식도 그저 단순한 '쉼'으로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안식, 평화, 안녕과 같은 말들은 바로 '영혼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 머무르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빠가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쉬면 직장도 나가지 말아야 하고 자녀들에 대한 돌봄도 멈추어야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쉬고 있다고 표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표현을 바탕으로 아빠가 쉰다는 것은 아빠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루어내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에는 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기 위한 충실한 배움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냉담자'라고 표현하다가 최근에는 그 표현이 좀 심하다 느껴졌는지 '쉬는 교우'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더 큰 영적 어둠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서 아버지를 떠나갔...

단순하고 복잡한 사도직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꽤나 단순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거창한 병원을 세우지도 복잡한 규율을 가진 학교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전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신앙을 주변에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을 살아야 다른 이들에게 그 신앙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부터 신앙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안에 충만한 신앙을 타인에게도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더할나위 없이 복잡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본질에서 갈수록 멀어져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는 껍데기를 신경쓰느라 찐빵 안에 팥이 들었는지 바퀴벌레가 들었는지 거의 신경쓰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행정기관처럼 변해 버렸고 사람들은 복음의 열의 없이 살아가고 그것을 전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가정 안에서도 복음의 빛이 전달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은 여전히 단순합니다. 마치 빛이 밝고 직진성을 지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환경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빛을 '산란'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질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몇 가지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기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기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기 마귀들을 쫓아내기 이 네 가지 사안은 '영적인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는 이 일이 실제로도 일어났습니다. 그의 내면의 영이 치유되는 순간 그 결과가 외견으로도 표현되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다 영적이고 내적인 면모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영혼에 질병...

양육

자녀는 어떻게 키울까요? 일단은 그 몸을 성장시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DNA가 담긴 씨앗들이 자녀의 몸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먼저는 엄마 뱃속에서 그리고 태어나서부터는 음식으로 몸이 성장합니다. 그저 성장만 시키는 게 대수는 아닙니다. 건강하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흔히 자녀의 건강 문제를 앞에 두고 노심초사 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녀에게서 몸만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서 그 내면에 이성과 감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성을 성장 시키고 나아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영화도 보고 하면서 감성도 챙겨야 합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아는 게 없는 무지한 상태이거나 감정이 메말라 있는 아이들을 두고 우리는 '미숙하다'고 표현합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아는 부분이고 알아서들 잘 챙기는 부분입니다. 혹시나 자신의 자녀가 미숙한 취급을 받을까 싶어, 사회에서 도태될까 싶어 열심히 챙깁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영역입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영혼이 존재합니다. 이 영혼은 부모가 낳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키우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혼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된 것입니다.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은 초월적인 양식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안에서 이 영혼의 양식을 두고 '은총'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빛을 비추고 영혼을 '거룩한 진리' 안에서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미사에 나오고 성사생활을 합니다. 또한 이 미사, 즉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외적인 행위가 자동으로 영혼을 성장시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을 '마음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물을 먹지는 않더라도 물가에는 데리고 올 수 있습...

생명의 음식

낚시하는 사람이 떡밥을 뿌리는 것은 고기들이 모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떡밥 자체의 가치에 매달려 있다면 낚시꾼은 아까워서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물고기이기 때문에 기꺼이 떡밥을 희생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하신 것으로 처음부터 기꺼이 선물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의 것을 추수해서 당신에게 돌려드리기를 바라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낚시꾼에게 떡밥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이 영혼이 돌아오게 하려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험’을 하십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이 그분께로 향해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려고 하느님은 우리를 부족하게 만들고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런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게 매달려 있는지 아닌지 당신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다른 한 편, 우리는 구원을 찾아 이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미사에서 이 구원이신 분을 마주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음식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먹고 마십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음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실까요? 그저 입으로 씹어 삼기는 밀떡 조각이 전부인 것일까요? 아니면 달리 그 음식을 먹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

아버지를 보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마치 하늘에서 쨍 하니 빛이 나고 하느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식으로 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보고 믿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례로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에 얼마나 겸손함이 있고 감사함이 자리잡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무언가를 선물했을 때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아주 작은 정성에도 감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 비싼 것을 주어야만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내면을 '본' 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보기를 바라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시적인 것에 현혹되지 말고 한 사람의 진실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흔히 사기꾼들은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감추기 위해서 겉을 꾸미고 다닙니다. 다단계를 하는 사람들은 결코 후줄근하게 다니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이 성공한 사업가인양 외견을 꾸미고 다닙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고 그들에게 원치 않는 물건을 팔아치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솔한 사람은 외견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진실성을 봅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참된 사람인지, 얼마나 신심이 깊은 사람인지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외견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를 보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지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보게 될 것이고 저는 여러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의 교육이 보입니다. 작은 것을 선물해 주었을 때에 아이들...

성장하는 교회 / 쪼그라드는 교회

사도행전은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원래는 한 사람이 하던 일을 이제는 쪼개기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사도들이 말씀도 전하고 식탁의 봉사도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신도들이 늘어나고 일이 많아짐에 따라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고유 능력에 속한 말씀 선포에 더 열중하고 반대로 식탁의 봉사라는 직분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확연히 줄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전에 나뉘어졌던 것들이 합쳐져야 할 시기입니다. 이런 저런 직분들 가운데 사실상 거의 쓸모가 없는 직분들이 거두어들여져야 합니다. 심지어는 사제의 삶도 전에는 챙겨받던 것들을 이제는 스스로 해야 합니다. 식관을 구하는 것은 사치가 되었고 알아서 살림을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핵심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요의 시기를 거쳐오면서 엉뚱한 일들에 많이 매진했습니다. 정작 말씀은 소홀히 한 채로 외적인 요소들을 성장시키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아 왔고 이런 모습은 아직도 관찰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과연 우리의 영적 집은 어떤 것이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우리가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느님께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현대의 세상은 사실 신앙의 본질을 부끄러워합니다. 때로 성당에 사진을 찍으로 오는 분들에게 '성당에 사진만 찍으러 오시지 마시고 성당을 한 번 나와 보시죠.'라고 하면 저를 이상한 잡상인 쳐다보듯이 보는 시선을 느낍니다. 과거에 교회가 성장세일 때에는 교회에 나오라고 초대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었고 그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것을 주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지금 이 쪼그라드는 시대에 교회로 초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에...

짐승의 죽음에 대한 책임

성경은 종종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표현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에서 그에 상응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환시 속에서 그의 앞에 수많은 짐승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온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식별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사실 세상의 창조의 모든 과정을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분이 만드신 모든 짐승들도 그 자체로 깨끗하고 좋은 것들입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이들이 우리 자신들, 즉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래서 '선교'를 고유한 사명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도 선교에 대한 명령이었지요. 우리는 할 만해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고유한 이름을 달고 있다면 말이지요. 우리는 다만 하느님과 그들 사이에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감히 그 연결을 끊어버릴 자격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짐승이 짐승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들의 탓이 아니라 그 중간 역할을 하지 않는 우리 신앙인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듣지 못한 것을 누가 그들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몫을 해내지 않고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탓으로 회개하지 못한 그들에 대한 책임까지도 지게 될 것입니다. 칼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였는데 칼이 쳐들어와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잡아간다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잡혀가는 것이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내가 파수꾼에게 묻겠다. (에제 33,6)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내...

참된 목자

그저 온순함이 양의 성정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양의 핵심은 목자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온순해도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목소리, 즉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다면 그를 양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는 그저 성정이 온순한 들짐승일 뿐입니다. 목자의 목소리는 어떻게 알아볼까요? 그것은 그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에서 드러납니다. 목자는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부릅니다. 목자가 하는 모든 활동은 구원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구원으로의 초대는 마냥 쉬운 길만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힘을 길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목소리는 때로 우리를 고난으로 초대하기도 합니다. 물론 목자가 고난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기에 그 방향으로 초대하다 보면 고난이 생기는 것 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부모님의 자녀 훈육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것을 무턱대고 다 해주기만 하는 부모는 옳은 부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참을성도 길러 주어야 하고 때로는 양보하는 법도 가르쳐야 하며 때로는 용기있게 불의에 맞서는 법도 가르쳐야 올바른 부모가 됩니다. 그저 사달라는 걸 모조리 다 사주고, 해달라는 걸 모조리 대신해 주기만 하면 그 아이는 반드시 그릇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습니다. 자신을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양들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은 목자인 척 양들을 이끌어 그들을 죽음의 길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목자의 목소리를 식별해야 합니다. 그저 '인도자'가 하는 말이라고 무턱대고 믿을 것이 아니라 그가 맺는 열매로 그를 식별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소가 메마른 시대에도 여전히 성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이를 찾고 있습니다. 사실 성소...

타락한 세대와 고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고난' 다른 말로 '고통'입니다. 하지만 고난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존재합니다. 겪지 말아야 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이 있고 자진해서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먼저 겪지 말아야 하는 고난은 스스로의 그릇된 선택으로 주어지는 고난입니다. 지나치게 담배를 피워서 폐가 겪는 고난은 내가 멈춰야 하는 고난입니다. 스스로의 몸에 부담을 주면서 나중에 그것이 몸의 통증으로 나타나면 그때에 사람들은 불평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본들 소용이 없는 것이 그것은 스스로가 불러들인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세상의 힘에 기대려고 합니다. 즉 돈을 많이 벌어서 스스로 불러들인 고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일시적인 위안은 얻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면 그릇되이 걷고 있는 자신의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를 회개라고 부릅니다. 다음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사회 안에서 한 명의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배워야 마땅하고 여러가지 일들을 겪어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당연히 수고가 들게 마련입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우리가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습니다. 또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나무가 쓰러질 수도 있고 태풍이 오면 창문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 앞에서 서로 힘을 모아 도와 가며 이겨내야 합니다. 이런 고난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그릇을 넓히고 나아가 서로 연대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번째 고난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성소는 어떻게 시작되고 자라날까?

사실 모든 과정은 신비에 감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성소에 들어서는 여정은 저마다 다 다르고 그 과정 역시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어떤 영혼을 선택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저마다 각자의 응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그것을 통틀어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찬찬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출발 먼저는 아예 모르는 것을 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을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성소에 있어서 '초대'는 그 시작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하다. 그 초대가 반드시 '신학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될 필요는 없다. 다만 누군가 초자연적인 이상을 향해 초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성소의 시작은 신학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시작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대는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 첫 시작점을 전달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특히 부모의 역할은 중요한데 부모의 조력 속에서 성소의 길을 가는 것과 부모의 반대, 혹은 무관심 속에서 성소의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은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시작부터 그 의지를 꺾인다면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부모는 기도해 주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성소의 싹이 자라난 자녀에게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 다음으로는 부르심이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소방관이나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꿈꾸는 것과 실제로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어린 시절 표현되는 성소의 싹은 좋은 계기이지만 사실 그건 성당을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

무엇을 믿어야 할까?

수학의 명제는 의심받지 않는다. 1에다 1을 더하면 2가 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의 명제는 곧잘 의심받는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부터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그분의 뜻과 그분이 하시는 일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예컨대 성경을 믿으라 하지만 성경은 곧잘 의심의 대상이 된다. 올바르게 전파된 것인지 올바르게 번역된 것인지. 애시당초 성경이 인간에 의해 짜집기 된 책은 아닌지? 또 교회를 믿으라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바람직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오류, 심지어는 지도자들의 오류를 통해서 사람들은 신앙에서 멀어져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일종의 세뇌와 정신착란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 신앙인은 거대한 집단 광기의 희생양일 뿐일까? 신앙은 수학이 아니다. 신앙은 '의지'와 관련된 것이고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물'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물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맑은' 물이 있다. 오염된 물이 있고 먹지 못하는 물이 있는가 하면 덜 오염되고 더 맑은 물이 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더 맑은 영혼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순수의 절정에 계신 분, 물 자체를 만들어 내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수용은 신앙인에게 가장 첫 단계를 형성한다. 깨끗해질 의지가 없는 이는 순수함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존재의 타락을 체험하고 있는 이들, 그래서 정화의 필요를 느끼는 이들이 더 맑은 물을 찾게 마련이다.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셈이다. 이 첫 갈증으로 신앙에 발을 내디딘 이는 그때부터 여정이 시작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참으로 이 여정을 걷는 이들만이 아는 것이다. 이 여정을 시작도 하지 않...

모두 저마다의 길로 간다

우리는 저마다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마냥 다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작게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부터 이 일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함께 이득을 얻기를 바라기에 회사가 잘 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 일을 합니다. 나아가 이런 방향은 정치색으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이상에 따라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고 그 길을 함께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영혼의 결, 또는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길과는 다르게 영혼의 방향은 오직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하느님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견대로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영혼을 이끌어야 하는 소명을 지닌 이들이 저마다의 인간적 약점으로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은 의외로 뚜렷하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스승을 따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만나를 먹은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아닌 세속적인 이상을 뒤따른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질 것입니다. 그릇된 길을 스스로 선택한 탓입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오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 저마다의 보속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필리포스와 내시는 같은 뱡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들은 마치 소금이 물에 녹듯이 서로를 만나 알아보고 신앙의 정수를 빨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바라는 것을 얻는 법입니다. 신앙을 정말 배우고 싶은 신앙인은 사제에게서 거룩함을 찾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욕구가 가득한 신앙인은 사제를 이끌어 술을 배우게 만들고 도박을 하게 만들고 고급 스포츠를 즐기게 이끌어 버립니다. 그리고서는 마치 자신이 그 사제에게 좋은 것...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근본 '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죄일까요? 사실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러 이러한 것이 죄라고 하니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주일 미사 빠지면 죄라고 하니 그게 죄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죄의 근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라고 생각하고 죄가 아닌 것도 죄라고 생각하는 셈이지요. 빛과 어둠을 가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태양은 빛입니다. 반대로 태양이 사라지면 어둠이 시작되지요. 하지만 이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전등불이 들어와 빛이 비치면 이건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태양보다 어두우니 어둠이 될 수도 있고 밤보다 밝으니 빛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복잡합니다. 원래는 복잡하지 않은데 인간이 복잡한지라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십니다. 이는 신앙인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명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선한 분은 아버지 한 분 뿐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 10,18) 그렇다면 선은 분명합니다. 선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선'은 하느님께 다가서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반대의 방향과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모두 죄스런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방향성과 움직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들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분류하는 '죄인들'보다 상당히 우위를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 생활 속에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극단적으로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에게로 다가서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기에서는 답이 갈립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극단적으로 고수하려고 드는 율법의 형식 속에서 하느님이 의도하는 것에서 도로 멀어질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일은 ...

요셉에게 일어난 일

요셉에게 일어난 일을 구조화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합리한 상황 - 거룩한 지시 - 믿음의 수락 먼저는 불합리한 상황이 생겨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합리한 일들도 있고 말도 안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신앙'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의 범주 안에서 할 일이면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 역시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는 '파혼'이라는 정상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요셉의 좋은 성정대로 그 파혼을 '남 모르게' 준비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요셉이 다루어야 하는 일은 정상적인 범주의 일을 벗어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내면에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거룩한 지시가 등장합니다. 요셉에게는 그것이 꿈이라는 수단으로 주어졌지만 꿈이라는 수단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범주에서는 교회나 영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믿어야 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이의 거룩한 명령을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 거룩한 지시를 무시합니다. 그건 오늘날 교회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거룩한 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코미디언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의 근원적인 행방의 문제를 교회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믿음으로 수락합니다. 복음은 이를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순종, 순명은 대표적인 믿음의 수락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수도자들도 장상에게 순명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대인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거부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은 모두 스스로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순명...

기적과 세속성

기적은 거룩한 신심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기적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으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이의 내면에 흐르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기적은 '아무에게나' 보란듯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예수님에게 표징을 달라고 떼를 쓰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 말고는 없을 것이라고 하셨고 반면 제자들은 따로 데리고 가서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신다. 세속화된 세상에 기적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이는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자신을 드러내기를 더욱 조심한다는 말이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그 기적을 체험할 만한 신심 속에서 신중함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신기한 체험을 떠벌리고 저마다의 세속성으로 난도질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하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만 함구령을 지켜 나간다. 기적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을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겸손하고 낮추인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비가 와서 낮은 곳으로 흘러들듯이 기적은 그 낮고 겸허한 영혼을 향해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한 이는 말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그 기적에 대한 응답을 증거한다. 세속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고쳐 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는 이들의 범위는 당신이 사는 영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영역에 고착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얼마든지 외부에서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영역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예언자는 꼴사나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영역을 넘나듭니다. 그런 가운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 예언자는 자신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것을 베풀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나아가 예언자는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지 동네의 유지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모습들 중에 하느님에게서 어긋나는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죽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로 예언자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처럼 느낍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오던 일들을 예언자가 막아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자를 죽였고 죽이려 들고 죽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하느님의 비호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순간까지, 그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자신이 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벼랑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납니다. 저 역시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밀어붙였고 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사목을 계속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허락하실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까지 묵묵히 제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믿는 이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되었고, 엘리사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파견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서 구원의 표지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납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목마르신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르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그분의 육체적 필요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만일 그분이 육체적 필요를 뒤쫓아 다니실 것 같았다면 애시당초 십자가 위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감과 적개심, 살인 의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리 알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목마름은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연히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화 중에 자꾸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생수를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목마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갈증을 채우는 물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물을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서 달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그 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결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온갖 기적을 하시는 분이 그저 그에게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목말랐던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육체의 식량을 가져오고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믿게 데려옵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목마를까요? 저마다 목마른 것을 찾게 마련이고 그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목마르지 않은 이를 아무리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아 본들 그는 결국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목마른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 놓아도 결국 하느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오다

광야에서 물을 얻을 수 없고, 더군다나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상식입니다. 모세는 사실 양측에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 말이 안되는 요구 앞에서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더 힘을 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위를 쳤고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순응하는 이는 그 열매를 얻게 됩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일이 이루어집니다. 본당에 나와보면 여러가지 현실들이 보입니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수십년간 쌓여 온 그곳 만의 고유한 어려움들을 해결할 가능성은 0퍼센트에 수렴합니다. 헌데 하느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바위'에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그 바위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바위는 물을 꺼낼 수 없습니다. 바위 안에는 내어줄 수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일이라면 가능합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황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축이고 그들 앞에 하느님께서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야말로 '광야'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목말라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적 갈증을 채워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제들은 바위 같습니다. 더이상 나올 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위태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하느님 앞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이 직분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러면 그 순간 물이, 생명의 물이 그에게서 터져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분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를 찾아 다닐 것입니다. 교회는 이 메마른 광야의 시대에서 바위를 쳐서 사람들에게...

제정신이 들다

둘째 아들은 이미 이 순간부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다만 그의 현실은 아버지의 집 밖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때부터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이 순간부터 아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가 다가오기 시작하는 순간에 오히려 그에게 달려갑니다. 그가 제정신이 들기 전에는 그를 붙잡아 본들, 그에게 달려가 본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떠나는 그를 말리지도 않았고 멀리 있을 때에 방문하지도 않습니다. 제정신이 들기 전의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죽었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첫째가 문제입니다. 그가 '화를 내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아버지 밑에서 '종처럼' 일하는 자신을 돌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를 타이릅니다. 첫째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선물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것이 부당하다 생각하며 자신들이 예수님을 보낸 하느님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줍니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건 그들의 몫입니다. 

최후의 시험

보통 시험은 준비기간 동안 잔뜩 준비하고 막상 시험 당일에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특히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 평가를 세상의 시험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의 장면은 그 안에 숨어 있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시험은 마지막에 선한일의 숫자와 악한일의 숫자를 더하고 빼서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셈이고 우리는 그 심판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개념입니다. 즉 시험 당일에 컨디션이 좋아서 찍기를 잘 해서 성적을 급격히 올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살아가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해 오는 일이 우리의 심판을 결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심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 자, 이제 이미 출제된 이 문제를 검토해 봅시다. 작은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돈의 양을 따지고 들거나 생활 수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작은 이를 말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외된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작은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음의 기준은 여러 면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돈을 필요로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당신의 시간을, 당신의 노력을, 당신의 신앙 선포를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친구 가운데에서 여러모로 풍족하나 아직 신앙이 없는 친구가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좋은 친구인데 아직 그 누구도 그에게 성당을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앙이라는 보화를 선물해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인데 우리는 그를 굶주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급한 양심의 불을 끄기 위해서 가난한 이에게 돈 몇 푼을 쥐어 주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에게 그...

악마의 가장 기초적인 유혹

그것은 빵을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빵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영적인 영역을 희생해서 빵을 얻는 데 힘을 쏟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의 시대에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 가운데 하나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뒤로 갈수록 단계를 높여 가는데 사실 우리는 그 첫 단계부터 전혀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풍족하지만 반대로 너무나 영적으로 공허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현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을 도외시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헌데 굉장히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못 살 때에는 더한 열심으로 하느님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휴가를 가서 귀찮다고 근처 성당을 알아보지도 않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럼 없이 다음주에 와서 주일 미사를 빠졌다고 너무나 쉽게 고해를 합니다. 결국 외부적인 요인이 문제라기 보다 내면의 문제인 것입니다. 현대는 더 많은 이들이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의 현실을 보거나 사회의 현실을 보아도 무언가 건강하지 않은 모습들이 너무나 쉽게 발견됩니다. 이 모든 현실의 첫번째 원인은 빵을 만들려고, 세상의 것들을 위해 영혼의 영역을 희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까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사실 사람은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즉, 돈이 많아서 그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지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는 내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내면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가장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냅니다. 반대로 내면의 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어 주더라도 망가뜨리고 맙니다. 사실 악마의 유혹은 이뿐만이 아니라 더욱 교묘하고 영악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어떤 눈이 열리고 어떤 눈이 닫혔나?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느님 앞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걱정이 없었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바로 하느님이 시키는 게 있는데 그걸 그대로 하는 게 맞는가? 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유혹에 먼저 걸려 들었고 이어 남자에게도 그 유혹은 전염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 '눈이 열렸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살펴볼 게 있습니다. 어떤 눈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럼 그들이 전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에는 '눈'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린 눈은 세속에 대한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 각자가 하느님과의 유대 없이 각자의 삶을 책임지는 길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욕을 하면서 우리 몸을 보는데 부끄러움을 느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나 자신의 몸을 쳐다보면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 나아가 하느님의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죄를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서도 멀어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타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맑은 영혼은 하느님 앞에 가릴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아시고 그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거침없이 하느님께 열어 보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해소 안에서도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자신의 남은 자존심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 사순시기의 첫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쪼록 고해를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사순의 시작에 고해를 보...

착한 것과 착해 보이려는 것의 차이

착한 사람이 있고 착해 보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은 마치 향수병에서 향기가 나오듯이 착함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옵니다. 내면이 근본 선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선에서 기인하는 일이 됩니다. 반면 착해 보이려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 근본 착하지 않기 때문에 착해 보이는 외적 요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착한 일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애를 써서 억지로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자신의 내면 속에 착함이 머무를 공간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그런 일을 하려고 해도 착함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도 됩니다. 비가 올 때 물이 고이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낮은 곳입니다. 높은 곳에는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억지로 물을 모아다가 높은 곳에 쏟아내면 자연스럽게 그 물은 낮은 곳으로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비처럼 내리는 것입니다. 그걸 억지로 끌어모아 누군가에게 쏟아붓는다고 그것이 그에게 모두 전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게 만들지 않는 이상 드높아진 영역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머무르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한 활동을 착하지 않은 사람이 따라 한다고 착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착한 내면을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뒤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선함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우리가 착해지는 그 첫번째 여정은 바로 화답송에 나오는 것처럼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부숴뜨릴 때에 비로오 선의 시작을 마련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순간부터 은총은 알아서 길을 찾아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

어제 한 젊은 친구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우리의 앞길도 다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하느님은 우리의 앞길을 모두 알고 계셔.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어. 선택을 하고 난 이후에 그 여정이 어디로 가 닿을지 하느님은 아시지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어.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고자 애를 쓰시겠니? 만약에 우리에게 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일이 다 결정되어 있는 거라면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도 없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텐데 말야.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이 열려있어." 그래서 오늘 1독서 안에는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줍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힘 있는 자들의 배척을 당하는 길이고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반대의 길이 좋다고 세뇌를 시킵니다. 십자가는 최대한 버리고 힘 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은 정반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먼저 가신 그 길을 걸어야 하고 우리 스스로를 버리고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에게 길을 바꾸라고, 다른 표현으로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지는 지상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의 가장 기초적인 메시지는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혼의 주머니

구멍난 바지 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는 친구는 멍청한 친구입니다. 그 구멍으로 사탕이 줄줄 새어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구멍이 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 몇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보이기 위한 선행 우리가 선행을 하고 나서는 곧잘 그 선행을 광고하고 다니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영혼에 구멍을 내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의 그 허영이 영혼에 구멍을 내고 나면 선행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된 좋은 것들이 영혼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 빠져나가 버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 허영의 구멍으로 들어와서는 안될 것도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빠져듭니다. 자신이 한 작은 선한 일이 충분히 자신의 좋은 습관으로 굳어지기도 전에 그것을 모조리 다 까발려 버립니다. 결국 그가 한 선행은 온데간데 없고 그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얻고자 한 것 뿐입니다. 2. 드러내는 기도 기도를 하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보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람들이 보란듯이 의도적으로 공공연히 자신의 신심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또한 영혼에 구멍을 뚫고는 그 영혼에 성스러움을 채우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사탄이 즐겨 듣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영을 채워줄 다른 요소들로 그들을 이끌어갑니다. 이런 이들은 곧잘 자신이 성녀라도 되는 듯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스러움을 알리고자 애를 쓰고 곧잘 예언자의 흉내를 내어서 사람들을 꼬시려고 애를 씁니다. 사실 이런 이들은 거룩한 이들이 아니라 고약한 이들입니다. 영적으로 굉장히 교만하고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데 성당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헷갈려 합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는 성당에서 추구해야 할 거룩한 행동을 너무나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식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들이 요란한 깡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기도하는 이에게서 보이는 평화와 기쁨이 ...

주도권 다툼

다툼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사실 그건 우리 사람쪽에서 바라보는 관점일 뿐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전해지는 바는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2독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권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넓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소유한 것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움직임은 돈에 대한 추구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 돈을 뒤쫓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성당에 좋은 신앙 강좌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광고 문구를 '서울에서 회당 백만원씩 하는 강좌를 이곳에서 무료로 전해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실제로 오는 사람마다 10만원씩만 주더라도 사람들은 좋다고 모여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쥐어 보려고 아둥바둥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우리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멀리 도망가려고 하면 할 수록 죽음은 더울 우리를 치열하게 뒤쫓아오고 결국 하나씩 둘씩 세상에서 사라져 갑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잘난 이도 못난 이도 모두 죽음을 이겨내지는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바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우리를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어떻게든 늘려 보려는 수명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려는 전혀 다른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전혀 다른 생명, 주님은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

자기 일에만 골몰하는 부자들

성경이 말하는 부자에 대한 관점은 바로 그 부로 인해서 비천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세상의 추이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흥미로운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부자가 되도록 하고 많이 벌고 많이 쓰기를 종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할 때에 단순히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우리는 마음을 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공기를 소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어디에나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유함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동시에 그것에서 분리될 때의 고통을 예비하기도 합니다. 예컨데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자체에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동 수단으로서의 필요에 의해서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하지만 내 차를 소유한 사람은 그때부터 그 차가 어디 긁히진 않는지 마음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부유해진다는 것은 내가 가진 영혼의 능력의 상당 부분을 거기에 투자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냥 의미없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없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지닌 부에 골몰하기 시작합니다. 헌데 우리에게는 한정된 자원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삶이라는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세상의 물질에 골몰하는 동안 그 시간들이 소진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생의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쓸데없는 것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허비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심지어 영적인 것도 '소유'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복음처럼 예수님에게 와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 나의 경험 목록에 집어넣을 대상이 되고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체험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영적 탐욕을 알아 차리시고 그들에...

복잡한 신앙?

언뜻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 내용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고 다채로운 주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새방골 성당으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출발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어떤 수단으로 본당에 오려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 오는 사람에게는 새방골로 오는 주요 도로를 가르쳐 주거나 네비에 찍을 주소를 가르쳐 주면 됩니다. 반면 버스를 타고 오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노선이 있고 내리는 정류장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와룡산을 등산하고 있어서 와룡산 정상에서 새방골로 오는 길을 가르쳐 주려 한다면 전혀 엉뚱한 방향과 엉뚱한 길을 알려 주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길과 방법은 정말 다양하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새방골을 찾아오는 법'이라는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은 언뜻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이 표현은 다양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생명을 찾는 법,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법, 구원을 얻는 법, 참된 행복을 찾는 법 등등입니다. 그런 가운데 '율법'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그 근본 목적 속에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핵심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외적으로는 엄청 다양하고 수가 많고 복잡다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핵심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의 모든 계명들을 외우고 하나도 빠짐없이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율법이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가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 여전히 올바른 이해를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에도 언뜻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죄를 없애려는 사회

현대는 '죄'라는 것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적지 않은 부담을 가지는 것도 바로 이 '죄'리는 주제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가톨릭은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종교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오는 데에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죄라는 것이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건 사회의 문제이고, 환경의 문제이고, 심리의 문제이기에 결국 그 어떤 죄도 전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는 성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특히나 심리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영향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는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내 탓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을 부여받은 이들입니다. 그 영역이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자유가 있고 우리는 그 영혼의 자유를 바탕으로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주어지게 됩니다. 행복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고, 생명을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불행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이들이고,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이 근본 방향은 절대로 변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담배를 권하고 담배 피우는 것을 찬양하는 것처럼 악에 물든 사람들은 악의 방향을 좋은 것으로 꾸밀 뿐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죽음이 생명을 이겨본 적은 없고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사실 이 방향을 올바로 아는 것을 두고 성경은 '지혜'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영리함은 사실 성경적 지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저 시험을 잘 치르고 ...

기적을 찾는 군중들

군중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은 호기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호기심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고 악한 일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 우리는 악한 일에 더 호기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군중의 시선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어둠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이야기거리를 얻을 것이고 그것을 퍼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일은 더 많은 장애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군중에게서 떼어 내십니다. 그 사악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군중에게서 떼어놓고 나서야 비로소 '치유'를 선물합니다. 또한 치유 직후에도 그들에게 제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 소위 군중들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언뜻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듯이 읽혀지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신앙에 조금 눈을 뜨고 맛을 본 사람들은 흔히 신앙의 기적들을 신기해 하고 그것들을 찾아다니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기적은 선물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은 로또복권처럼 오는 게 아닙니다. 기적은 하느님을 성실히 사랑하는 이에게 부어지는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기적의 기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기적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마치 향기 나는 곳에 벌들이 모여들듯이 참된 신심을 내면에 간직한 이에게 기적이 찾아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적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오히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갈망을 가진 이에게 주님은 '에파타'하고 영적 눈이 뜨이고 영적 귀가 열리는 기적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의미

  바로 어제 독서에서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그것이 모두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여정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악인의 삶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일련의 행위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올바로 성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교회가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에게 참된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제사는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존재의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제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우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우상은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비록 모양새는 저마다 다 다를지 몰라도 내용은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대조되는 것으로 인간의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대변하는 금송아지상을 세운 것과 같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것이 꼭 외적으로 형태를 지니고 표현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 방향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언뜻 우리 성당은 순례지에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 성당을 왔다 가면 '성지순례'를 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예쁜 등나무 소문을 듣고 그 사진을 찍으러 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탬프'가 있다는 소식에 와서 도장을 찍고 가기도 합니다. 본디 성지 순례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을 내려놓고 거룩한 곳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보다 잘 배우기 위해서 실행하는 고된 여정이라 '순례'라고 ...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

오늘 복음에는 다양한 부덕함들이 등장합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그것들입니다. 언뜻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다 배워 두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하나하나의 어두움들을 모조리 파고들어서 그 특성과 주의해야 할 점들을 아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근원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악'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악은 어두워진 영혼의 결과물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재미난 게 내면의 영역을 감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감추어도 결국 감출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의 행실은 결국 내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올바로 식별하면 그 사람의 내면에 든 것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도 선의 가치 일부를 지닐 수 있고, 반대로 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도 때로는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식별자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그의 주된 성향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물고기가 어쩌다 물 밖으로 뛰어오를 수는 있어도 결국 그가 숨을 쉬어야 하는 것은 물 속입니다. 반대로 원숭이도 어쩌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댈 수는 있지만 물 속에 있는 것이 그의 본질은 아닙니다. 다른 한 편 재미난 부분은 사람의 내면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둠의 사람을 앞에 두고 그가 변화될 때까지 빛을 비춰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악에 물든 세상에 십자가라는 빛을 비춰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주의할 점은 우리의 능력치를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조차 악의 유혹에 쉽사리 시달리는 사람이 강한 어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빛으로 이끌겠...

치유는 오늘날에도 가능한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치 '만병통치약'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가오는 병자마다 손만 대어도 낫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의 창조주이신 분에게 육체적인 병을 치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신다면 새로운 몸을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 메세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우리의 구원자로 다가오신 분은 당신의 치유를 통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유형의 치유를 더이상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간혹 자신을 스스로 '치유자'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실제로 검증에 들어갔을 때에 정말 예수님처럼 치유하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을 해서 병증의 이유도 알고 그 해결책이 나와 있는 병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의 힘을 빌어 치유를 찾는 이가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아프면 병원을 가지 누가 사제를 찾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치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치유는 육체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리'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치유는 영혼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악에 손상을 입고 부도덕함에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구원자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사제의 안수를 필요로 합니다. 믿음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오늘날에도 사제의 치유 권한은 여전히 작동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영혼의 영역에 큰 관심이 없고 따라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도 못하며 사제에게 영적인 치유를 위해서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고해소는 텅 비어 가고 있고 평일미사의 은총에 목말라 하는 이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들 저마다 믿는 대로 되길 바랍니다. 마을이든 고을이...

경계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

지옥은 싫은데 딱히 천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에게 멀어지면 안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착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들에게 딱 좋은 것은 바로 율법, 법규,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건 선을 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최소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것만 지키는 신앙인... 하지만 사랑을 향해 나아가거나 더 이상의 배움을 거부하는 신앙인. 오늘날 주변에서 자주 발견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언뜻 그들은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밭으로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들입니다. 묵시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라는 말의 대상이 되는 이들입니다. 아이를 돌보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은 아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저 아이의 부모가 몇 시에 밥을 먹이고 몇 시에 재우라는 지침을 주었다고 해서 다른 건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그 시간에 아이가 빽빽 우는데도 입에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아이가 제 시간에 잠들지 않는다고 감기약을 먹여서 재운다면 그건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잘못하다가는 아이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규정만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할 일을 하고 겉으로 좋아 보이는 신앙 활동을 하고 있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또한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하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

신앙인의 맛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신앙인의 맛은 복음에 바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착하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착함을 오해합니다. 착함을 그저 무슨 짓을 하든지 다 받아들이기만 하는 태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착함은 순박함, 부드러움, 온유함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착함은 영혼의 올바른 방향을 의미합니다. 휴대폰을 가지고 밤새도록 놀겠다는 아이에게 그저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착하기만' 한 엄마는 사실 착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방임이고 그것은 사실 착한 게 아니라 나쁜 것입니다. 착한 엄마는 그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런 조치가 설령 아이의 미움을 사더라도 그것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착한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신부는 그저 될 대로 대라고 내버려두는 신부가 아닙니다. 일이 올바로 진행되도록 신경쓰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설령 신자들의 반감을 사더라도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착함은 그저 '부드러움'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방향과 그 방향을 굳게 지키려는 용기와 강직함도 들어 있습니다. 나아가 세속적인 요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과 천진함, 그리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바른 것을 지키려는 정의로움도 들어 있습니다. 결국 착함은 특정한 외적 성향 하나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저 나름대로의 하느님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착한 하느님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고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선으로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훗날 우리는 그런 분 앞...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곳에 기꺼이 투자합니다. 나에게 무언가 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은 그 이득을 '자본'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사기꾼들이 득세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겠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이고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생을 한탄하며 살거나 심할 때에는 목숨까지 내다버리곤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이득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여기서 잠깐 검토해 봅시다. 위의 모든 것은 나의 고유한 것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닙니까? 내 양식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 내 공간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옷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시간과 노력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은 모두 나에게 존재하는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에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 설명됩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우리가 나의 것으로 부족한 이들을 채워 줄 때에 그것은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빛을 증가시키고, 나의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며, 의로움이 나의 길을 이끌게 되고, 주님의 영광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큰 이득은 우리가 부르실 때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

어디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우리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그는 꿈꾸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설령 자신에게서 완성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을 지니고 거룩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꿈꾸는 사람들이고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부와 권위도 그의 어두운 마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강박적으로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죄는 그렇게 사람을 옭아매고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처음부터 죄가 심각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마치 미끄러운 내리막처럼 죄는 서서히 한 사람을 더 큰 어둠으로, 더 큰 어둠으로 서서히 내려가게 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죄악을 심심찮게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헤로데는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할 기회,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싶은 기회를 노렸을 뿐이고, 헤로디아라는 악녀는 그의 허영과 교만을 이용해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되었고 남은 평생을 그 죄책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갈까요? 거룩한 희망일까요? 아니면 갈수록 깊어지는 죄악의 어둠일까요? 깊이 묵상하고 회개하고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