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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 3일 화요일 [(녹)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하늘 나라를 거부한 사람의 특징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하늘 나라를 거부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보기에 딱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뜻 정당해 보이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밭을 사서 보러 가야 한다.', '겨릿소 다섯쌍을 샀는데 그것을 부려 보러 간다.', '방금 장가를 들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탓은 '거부'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유일한 탓은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현시대의 신앙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딱히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하느님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입니다. 그들은 쉽게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치명적이고 핵심적인 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내면 속에 사실상 하느님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들은 뭔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이 최종 주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마지막 목표점이 아닐 때에도 인간은 언뜻 외적으로 착해 보이는 듯이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그들의 눈앞에서 몇 번 착해 보이는 생활을 하면 사람들은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함과 착함의 본질은 선해 보이는 외적 활동이 아니라 나의 모든 행동의 근거가 '선'을 목적으로 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활동이라도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죄이고 그것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죄입니다.

2026년 11월 1일 주일 [(백) 모든 성인 대축일]

 거룩함 거룩함은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하다'는 표현을 할 때에는 간단히 말해서 그것이 하느님을 위해서 따로 구별되어 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수많은 장소들이 있지만 우리가 있는 곳을 성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곳이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의미의 '聖'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이면 모두 비슷한 이유입니다. 성직자, 성작, 성합, 성소... 모든 것이 하느님을 위해서 따로 분리되었다는 의미힙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인은 하느님을 위해서 따로 분리된 의지를 지닌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속인'이라고 합니다. 세속에 속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성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따로 구별된 이들이 되기 위해서, 그분이 마련하신 곳에 들어가려는 고결한 목적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쳐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삶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목표를 둔 이는 자신을 순결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세속적인 욕망에 물들지 않도록 그리고 고결한 것을 더욱 갈망하도록 자신을 가꾸어 나갑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로 우리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오지만 그들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성당에 오는 것인지, 아니면 성당에 오는 것이 뭔가 이익을 주기 때문에 오는 것인지 충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속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짓된 존재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참된 의지를 지닌 이들은 성별될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

《악마의 몰락》의 논리적 문답과 의지의 메커니즘

  《악마의 몰락》의 논리적 문답과 의지의 메커니즘 안셀무스의 《악마의 몰락》(라틴어 De casu diaboli )은 제목과 달리 악마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의 문답으로 “악한 의지가 어떻게 생겼는가?”, “모든 존재를 선하게 창조한 하느님이 악의 원인인가?”, “악마는 왜 책임을 지는가?”를 차례로 따지는 철학적 대화입니다. 전체 28장은 신의 창조와 선의 성격에서 출발해, 의지·정의·악의 관계, 타락한 천사의 책임과 지식 문제로 나아갑니다. 라틴어 원문과 장별 목차 먼저 용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rectitudo 는 ‘바름’ 또는 ‘올바름’, iustitia 는 정의·의로움, commodum 은 유익하거나 좋은 것, beatitudo 는 행복을 뜻합니다. 안셀무스에게 정의란 단지 규칙에 맞는 행동이 아니라 의지가 마땅히 향해야 할 바름을 그 바름 자체를 위해 지키는 것 입니다. 이 기준은 《진리에 관하여》의 논의를 배경으로 합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 안셀무스 1. 문답의 출발점: 선한 것의 근원은 하느님인가 1장은 “네가 가진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성서 구절을 천사에게도 적용합니다. 피조물은 존재와 능력, 의지의 근원을 스스로에게서 갖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렇다면 악마의 타락도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대화는 이 의문을 곧장 결론으로 처리하지 않고, 악마가 “진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는 성서 표현을 분석합니다. 악마는 끝까지 바르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내·지속(perseverantia)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받지 못했을까요? 하느님이 주지 않아서일까요, 악마가 받아들이지 않아서일까요? 제자는 처음에는 하느님이 주지 않으신 것이 원인일 수 있다고 의심합니다. 스승은 인내를 지속적으로 바르게 있으려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시작할 때는 계속 머물려는 의지가 있어도, 그 의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면 인내를 완성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

가장 좋은 것

좋다는 가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담배를 좋아하지만 담배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술 자체를 싫어하고, 또 누군가는 술을 즐기지만 만취하는 것을 싫어하고, 또 누군가는 진탕 마셔야 술 맛이 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다'는 가치는 정말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요? '취향'에 있어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팝음악을 좋아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 클래식을 좋아할 수 있지요. 그건 오히려 다채로울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가치에 있어서 '좋고 나쁨'이 그때그때마다 달라진다면 큰일입니다. 참된 진리에 있어서는 두 가지 진리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선이 어떤 경우에는 선이다가 다른 경우에는 악으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것은 가장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선은 오직 하나 뿐이고 하나의 가치로 정립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그분이 의도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우리에게 가장 올바르고 확실하게 전달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성령'은 그 자체로 가장 좋은 가치인 셈입니다. 문제는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것이 우리가 '좋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에게 좋은 미래를 선물하기 위해서 지금은 학교를 가라고 독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좋은 가치이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당장은 힘들고 싫은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신앙 안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 앞에 드러나는 '좋아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연휴에 성당을 챙겨 가는 것보다 그냥 여행을 다니는 것이 더 좋은 선택처럼 보입니다. 계명을 따라서 허덕이듯이 살기보다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

2026년 10월 4일 주일 [(녹) 연중 제27주일]

  포도밭에 일어나는 일 우리는 축복과 저주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젊은 친구가 어린 나이에 인기 스타가 되어서 수많은 부와 명예를 쥐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아마 많은 이들은 '복받았다'라고 하면서 부러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어린 나이에 얻었으니 그건 분명히 복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미숙한 영혼에 부어진 세상의 부귀 영화와 명예는 흔히 그 영혼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절제를 훈련하고 세상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주어진 돈의 가치는 가난한 이를 돕고 선한 일을 하는 데에 올바르게 쓰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 부어진 돈은 흔히 자신의 쾌락을 채우고 타인 앞에 으스대는 데에 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신앙의 올바른 관점 안에서 그가 받은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셈입니다. 그럼 다른 주제를 살펴봅시다. 어린 친구가 성숙한 스승 아래에서 여러가지 혹독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건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사람들은 이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나 세상 살이가 더욱 편해지고 좋은 것이 가득한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 놓인 사람을 두고 '불쌍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이를 두고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의 내면에 올바른 영혼의 길을 훈련하기 위해서 외부의 시련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얻게 될 영원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신앙인은 그를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젊은이들을 성소의 자리에 보내면서 하는 일입니다. 소위 성직자와 수도자의 자리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거북하고 도망치고 싶은 자리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들에게 닥치게 될 시련과 고난을 알면서도 그들이 선택한 길을 축복하고 칭찬합니다. 이제 1독서로 돌아와 봅시다. 이사야서는 포도밭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전반부에서 포도밭에 이루어지는 주인의 돌봄을...

평화를 왜 싫어하는가? 2026년 10월 1일 목요일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평화라는 것은 물건이 아닙니다. 평화라는 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평화는 준다기보다 평화를 누리도록 준비시켜 준다는 것이 더 합당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어보자면 우리는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냥 서울대 졸업장을 받고 그 스펙을 누리기만 원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서울대를 간다는 의미는 그만한 수준의 학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졸업하게 해 주겠다는 말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나는 공부를 하기 싫고 고생하기 싫지만 그 열매인 졸업장을 원하고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서울대를 졸업하게 해 주겠다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만한 수준의 학식과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대학은 학업을 성장시키고 인격을 성숙시키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것은 평화 그 자체를 대상화해서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가능하게 됩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루카 10,5-6) 평화를 받을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내가 몰랐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그것을 성취하는 법을 잘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 달리 말해서 평화를 배우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들은 성가신 존재입니다.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안정, 이미 누리고 있는 세속적 안정을 불안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때가 되면 떠나갈 뿐입니다. 사실 온 것도 자신들의 의지로 온 게 아닙니다. 보냄을 ...

2026년 9월 27일 주일 [(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모두가 죽는다 오늘 1독서에는 죽는다 산다 하는 표현이 나오지만 사실 모두가 죽습니다. 그래서 1독서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진정 무엇이 죽는다는 것이고 무엇이 산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때로 우리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죄를 짓는다고 무조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서 얻게 된 부귀 영화로 우리의 육신을 더 잘 가꿀 수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죄는 영혼을 죽입니다. 반드시 죽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죄를 '사죄' 즉 죽을 죄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회개는 영혼을 살립니다. 죄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고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지상의 삶은 어찌 보면 '기회'입니다. 영혼의 죽음과 동시에 육신도 죽어 버린다면 우리에겐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이 지상의 삶은 당신의 자비입니다. 나아가 2독서는 우리의 영혼을 더 활력있게 가꾸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지만 때로 죄인들의 짐을 우리가 대신 짊어질 때에 우리는 거룩하게 됩니다. 혹자는 그런 삶을 '손해본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만을 두고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사는 사람이고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한 보상을 마련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손해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

자랑스러운 것 / 부끄러운 것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을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만천하게 공개합니다. 술꾼들의 모임에 가면 자신이 얼마나 비싼 술을 먹었으며, 얼마나 많은 술을 먹었는지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들 멍청해 보일 뿐이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만한 자랑거리가 따로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술을 마시고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했는지도 자랑하기도 합니다. 경찰에게 음주에 걸렸는데 교묘하게 피했다는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무용담인양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모임 안에서 그것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취하는 이들은 어리석음을 자랑거리로 삼으니까요. 반대로 부끄러운 것은 숨깁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가난하고 무식한 것을 숨기려고 애를 씁니다. 한 번은 한 자매가 자신이 친구 모임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꾸준히 거짓말을 해 왔다는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학벌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의 술꾼들의 모임처럼 그녀는 그런 종류의 모임에 나갔을 뿐입니다. 즉, 화려하고 값비싸고 고급진 것을 자랑으로 삼는 모임에 나갔고 또 그녀 자신 내면에도 그런 것을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마음이 들어 있었던 것 뿐입니다. 맑은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습을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맑은 정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거룩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한 하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반대로 세상에 온통 빠져들어 휘둘리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이제 신앙으로 건너옵시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을 드러내고 수치스러운 것을 감춥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자녀를 자랑할 때에 우리 자녀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랑할까요, 아니면 학교에서 100점을 맞고 번듯한 직장에 돈을 왕창 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까요? 반대로 자녀가 세속에 온통 빠져 하느님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까요 아니면...

고통과 평화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몸이 겪는 것은 분명한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전에 있을 때에 갑자기 배에 통증이 와서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119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저에게 생생합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몸을 지배하고 다른 일체의 활동을 막아 버립니다. 하지만 고통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면으로도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척 당하고 배신 당하고 배반 당할 때에도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헌신했는데 도리어 그들이 투서를 넣었다는 소식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그들은 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진짜 고통은 사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모든 근원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건 정신이건 고통을 겪을 때에 그 근본에는 '죽음의 위협'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 실제로 죽음으로 이끌어갑니다. 육체의 중한 질병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최근에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즉,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상황이 이러니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껏 시달려 온 것에서 일순간에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 밥을 먹다가 갑자기 빵으로 식사를 바꾸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늘 익숙해져 온 삶의 위협에서 해방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여전히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일시적인 해방과 탈출구를 찾아 헤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지닌 사람들, 성경은 그들을 '어리석은...

당신은 신앙 안에서 무엇을 받았는가?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의 원칙은 뚜렷하고 이는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바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바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는가?" 오늘 한 분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손에 선물을 쥐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에게 달리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머리에 조용히 손을 얹고 안수를 해 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손에 쥐어진 것 뿐입니다. 그들에게 사제가 주는 거룩한 축복의 안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것이 다 사라져도 하느님의 축복이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은 '향유'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의인은 '용서와 구원'을 바라봅니다. 서로 탐하는 게 달라서 얻는 것도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오늘날의 신앙 환경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는 길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뭔가 결과가 있어야, 눈에 보이는 뭔가가 있어야 얻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주는 향유를 아까워하고 여인이 받는 용서를 의미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죄인은 기껏해야 향유를 아낀 값이나 벌고 의인은 구원의 기쁨을 얻어 누립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속일 수 없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얻고 누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신앙 의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얻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주일미사나 지키고 판공이나 보는 것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세금이나 겨우 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주님에게서 무언가 얻을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언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의미 없게 여길 것이고 하찮게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주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분노 / 용서 2026년 9월 13일 주일 [(녹) 연중 제24주일]

  화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용서에 대한 집회서의 말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이런 것입니다. "분노를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용서라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에 앞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앙심을 품고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죄짓는 사람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이 말은 한 편으로는 맞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간 누구든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우리 눈에 드러난 이들의 죄과는 일부분일 뿐이고 사실 많은 이들의 죄과가 속에서 일어납니다. 아무리 정의로운 판관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사람의 속에 들어 있는 '의도'까지 식별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 내면을 바라보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심판하고 복수하고 죽이고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신앙인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정의를 신뢰하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단순한 이론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에누리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화내는 사람을 만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불의를 견뎌낸 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용서 우리는 용서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흔히 '무조건적인 용서'를 떠올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복음처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니 그냥 모두 용서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 용서의 전제는 뉘우침입니다. 상대가 성실하고 꾸준하게 죄를 짓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인데...

뼈들이 살아나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는 상상하면 끔찍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뼈로 가득찬 계곡입니다. 모르긴 해도 과거에는 이런 장면들이 간간이 보였을 것입니다. 전쟁이나 역병으로 사람들이 떼로 죽어나가면 그런 이들을 모아다가 구렁에다 던져 넣곤 했겠지요. 그러면 훗날에 그곳에는 뼈만 가득한 죽음의 계곡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즉,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뼈만 가득한 곳, 그것이 신심이 메마르다 못해 뼈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과거의 생기가 하나도 없이 늙고 병들어 있는 교회들, 젊은이들은 모조리 떠나버리고 그나마 있던 의욕들마저 메말라가고 뭘 해도 안된다는 죽은 사고만 가득히 팽배해 있는 곳, 바로 뼈로 뒤덮인 계곡과 같은 신앙의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참으로 도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될 리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안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언뜻 자연스러운 대답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 하느님에게 희망을 두는 대답입니다. 그의 답변 속에는 그 질문을 하시는 분에 대한 능력에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된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 당신이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안될 일이면 하느님이 아예 묻지도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보기에도 안되는 일이면 안되는 것이니 애시당초 물어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당신이 묻는 이유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헌데 하느님은 당신이 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을 '예언...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어찌보면 하느님은 꾸준하십니다. 당신의 뜻은 복잡하지 않고 굉장히 뚜렷하고 또 항구합니다. 그건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천주교를 흔히 ‘얌전한 종교’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사실 천주교가 얌전한 종교처럼 보이는 시절은 현대에 들어와서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에 천주교는 성가시고 유별난 종교, 즉 선교하는 공동체였고 사람들을 모으는 종교였습니다. 사도행전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가톨릭 교회가 얌전하다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부과되는 선교라는 뚜렷한 사명에서 도망가고 싶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사실 우리 성당 자체가 선교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당 옆에 세워놓은 김보록 신부님은 프랑스 사람이고 그 머나먼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온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처럼 프랑스 교회가 고상한 척을 하고 얌전만 떨었다면, 흔히 하는 말처럼  지금의 우리 성당 자체가, 아니 우리 한국 가톨릭 교회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신앙에 함몰되어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누리는 신앙의 편안함이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떠나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오늘 미사를 마치면서도 우리는 또 한 번 들을 것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대답하겠지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간단히 말하면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행복을 꾸린다는 구상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공식처럼 보입니다. 많은 돈이 곧 많은 행복의 근거가 된다고 착각하지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는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은 성모님에게 '믿으셨기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믿음이 행복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실 사람들은 쾌락과 행복을 착각합니다. 돈은 우리에게 쾌락을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행복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참된 행복은 외부에서 밀려드는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행복은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충실할 때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행복합니다. 물고기를 바깥에 꺼내 놓으면 너무 힘들어 할 것이 뻔 합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행복합니다. 원숭이를 물 속에 억지로 집어 넣으면 죽고 맙니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곳에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뜻 안에 올바로 머물러 있을 때에 행복합니다. 성모님은 그 행복의 비결을 아셨고 그래서 행복한 분이십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만 이해되는 이야기

오늘 복음은 반만 잘라내면 완벽하게 우리의 일상과 맞아 떨어집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앞부분, 즉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부분만 없앨 수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가 늘 하는 짓입니다. 누가 나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지면 그는 반드시 갚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고소 고발도 하고 감옥에도 집어 넣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그렇고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이익을 따지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요구하는 이가 먼저 다른 더 큰 이에게 많은 것을 탕감받은 상태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처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받은 세례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우리는 먼저 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종처럼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망각한 사람처럼 처신한다면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신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두 부류의 신앙인이 나뉩니다. 자신이 먼저 많은 것을 용서받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신앙인과 그렇지 않은 신앙인입니다. 앞선 신앙인들은 일상을 자신에게 허락된 기회로 이해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반대로 후자는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탐욕스러우며 현실적인 이득을 계산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행실대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현세에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내세에서는 가장 정의로우신 분이실 테니까요.

악을 탄식하는 이들

어제 어린이에 대해서 배우면서 하느님의 뜻을 순하게 받아들이는 이라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반대의 케이스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라는 것은 특정 행동의 준수 여부를 가리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에게 가까워지느냐 멀어지느냐를 기준으로 합니다. 죄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성당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의인이 되고 바깥에 머무른다고 해서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가가 더 큰 기준점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점을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우리는 지옥이라는 곳을 상상하기를 그곳에 가기 싫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잔뜩 모인 곳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 지옥은 그들을 잡으려는 선의의 뜻을 모조리 물리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뜻을 완전히 굳힌 상태로 모여든 곳입니다. 즉 그들은 천국에 가기 싫어서 지옥에 모여든 셈입니다. 사실 죄를 짓는 이의 내면은 선한 이들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선한 이들에게는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악인들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선하게 처신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힘든 일이 됩니다. 동네에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자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얼마나 힘겨워할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언제나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누구 흉을 보게 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힘들어 합니다. 1독서는 그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에제 9,4) 성당을 술판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장면을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이면 누군가를 험담하기를 너무나도 즐기는 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그 역겨운 짓을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저마다의 행실로 심판받게 마련입니다.  “...

못마땅하게 여기다

그들이 보려고 하는 것 1. 목수의 아들 사회적 금전적 능력, 지위 2.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출신 배경 3. 그의 형제들 / 누이들 인맥, 관계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예수님이 지니신 거룩한 힘의 출처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 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 남편, 누구 엄마, 누구 딸이라는 식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듣기 힘든 시련으로 작용을 했고 결국 사람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예레미야가 한 일은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려는 시도였고 그들을 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적의 선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소중한 은총의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반복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참된 예언자를 만나면 기뻐하기보다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만일 제가 술을 즐겼다면 술꾼들의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노름판을 좋아했다면 노름꾼들의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을 좋아하고 복음을 좋아하는 이들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예견된 결과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마치 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민족,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총알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지구 위에 살면서도 정작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 천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감지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일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 됩니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은 한 민족을 옹기장이 손의 진흙처럼 주무르십니다. 필요없는 부분이 있으면 떼어내고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전에 없던 진흙에서 떼어와 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손에 있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자신의 생애 동안 벌어지는 일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한계를 지닌 우리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영원 속에서 일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찮게 보이는 것이 나중에는 어마어마하게 위대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지금은 대단해 보이는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세대를 거쳐 가면서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는 분이라 당신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께 신실한 이들과 거짓된 이들이 나뉘게 됩니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외적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 영원 속에서 언제나 올바르게 실행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것인가 아닌가로 나뉘게 됩니다. 참으로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신뢰하지 못해서 조급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뚜렷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명한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선과 악의 분리입니다. 선을 근간에 두고 살아온 이들은 결국 하느님의 ...

처녀 딸이 얻어맞다 2026년 7월 28일 화요일 [(녹)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처녀 딸 내 백성이라는 말은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던 순수한 영혼을 지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런 이들이 세속이라는 것에 상처를 입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는 것을 얻어맞는다고 표현하고 세상의 속됨에 상처입어 가는 것을 참혹한 상처를 입는다고 표현을 합니다. 들이라는 곳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하지만 좋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영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무신론의 사상이 팽배해 있고 사람들은 교회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모습을 칼에 맞아 죽은 자들로 표현합니다. 즉 영혼에 생기가 돌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읍 안은 외부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곳으로 바로 교회 안을 의미합니다. 헌데 그 안에는 '굶주림'과 '병'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나아가 이상한 형태의 신앙이 병처럼 사람들에게 번져 나갑니다. 예언자와 사제라는 특정 직분을 콕 집어 이야기합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단순히 역사 중에 있는 한 나라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두 직분 외에도 많은 직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금이나 장수라고 표현했겠지요.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영적인 현실을 다루는 책이고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직분은 예언자와 사제입니다. 즉,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 교회의 현실과도 비슷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직무를 지닌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건물을 지으라고 하거나 인테리어를 바꾸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임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처녀 딸 이스라엘은 지금도 얻어맞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어맞고 있다...

왜 성경은 좋은 말만 하지 않는가?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해서 찾았다는 내용은 듣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물고기가 걸린 그물 비유를 하면서 악한 자들을 가려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다고 표현하느냐고 거북해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흐름'이 존재해 왔고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갈수록 '지옥'에 대한 언급이 약화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빛으로 이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지, 선하다는 것, 책임있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안정되고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둠을 경계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하고 어두우며 영혼에 크나큰 해악을 입히게 되는 것인지를 올바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태극기를 향해 사이렌이 울리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밤늦게 돌아다니면 잡혀가기도 하고 이런 저런 통제 속에서 살아오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예전처럼 밤늦게 다니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노선에서 신앙은 하나의 고삐처럼 여겨집니다. 성당에 오면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성당은 지금의 시대에는 탈출해야 하는 곳처럼 여겨집니다. 문화는 바뀔 수 있습니다. 제도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시선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분이 뜻하시는 바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거부해도 여전히 좋은 것이고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해도 여전히 옳...

의로움과 영광

우리가 부름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우리의 삶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체크하면 됩니다.  1. 나는 '의로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2. 나는 '영광스러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1. 우리의 하루의 삶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어둠에서 정화되어 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내면 속에 하느님이 이끄시는 '의로움'의 갈증이 생겨나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똑같은 욕구에 똑같은 악습에 시달리고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더 어두움에 빠져들고 있을까요? 이 부분을 진지하게 묵상해 본다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이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우리가 영광 속에 들어간다,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도 그것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중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마치 금속에 불에 정련되듯이 뜨거운 시련을 통해서 영혼은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검증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정에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모든 규정을 바르게 따르며, 저는 온갖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 당신의 법 하도 놀라워, 제 영혼 그 법을 따르나이다.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밀과 가라지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오늘 복음은 중요한 부분을 거의 대부분 설명합니다. 즉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종말에 저마다의 행실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설명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가 의인이 되고 누가 악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으면 마치 의인과 악인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이거나 처음부터 악인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골고루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할 일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씨앗에 물을 줄 것이며 어떤 씨앗을 키워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세상에 살지만 여러분이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여러분을 진리로 이끄는 가르침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저는 사제로 살아가지만 제가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저를 유혹으로 세상으로 이끄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예외없이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별하고 거기에 물을 주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겨자씨가 자라나 나무가 되듯이, 여러분과 저의 영혼 속에 심겨진 씨앗은 자라나 나무가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살지만 그 어느 신부님보다도 더 신심있고 거룩한 평신도들을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룩한 직분을 지니고 살지만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세속적인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섞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지켜 보시다가 결국 우리가 행한 것들에 따라 그에 적합한 결과를 선물하실 것입니다. 성...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우리는 '힘'이라고 하면 외적인 힘만을 생각합니다. 즉, 돈의 위력이나 권력과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내적인 힘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외적인 힘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즉, 인내가 없기 때문에 쉽게 구타하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식입니다. 내적인 힘, 즉 참을성과 인내가 있고 참된 신심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고, 하느님의 거룩한 정의에 모든 것을 맡길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외적으로 자신의 힘을 표출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사람에게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1. 의인에게 있어서 인자함이라는 덕의 발전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의 실현을 당장에 성급하게 하지 않는 것은 먼저 의인에게 있어서는 그들도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의인의 내면의 '사랑'이 더욱 커져서 심지어는 죄인들에게마저도 그 인자함을 펼칠 수 있기 위함입니다. 2. 죄인에게 있어서 회개의 기회 하느님은 죄인들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대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언제든지 정의를 실현해서 죄인을 멸망으로 몰아 넣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충분히 기다려 주십니다. 그래서 화답송은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보는 데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벌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내면 속에 벌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에게는 침이 있고 그 침에 쏘이면 심하게 아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는 벌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벌이라는 것은 작고 이쁜 날라다니는 것이지만 어른에게는 벌이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신앙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유롭게 선물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내면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긴가민가한 대상입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배를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배고픔 또는 쾌락은 확실한 표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배고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고 나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떻게든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작용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뜻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멀리 이민간 아빠라서 지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 아빠가 한 약속을 철썩같이 믿는 아이는 훗날 아빠가 돌아올 때에 그 약속에 상응하는 응답을 얻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을 선물해 주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가운데에는 얼른 이 미사를 마치고 내 입에 들어올 음식이나 내가 만날 사람, 내가 할 일, 내가 벌어들일 돈에 대한 염려가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성경이 말하듯...

나의 말은 완수될 것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한 사람의 말은 그 당사자의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지 아닌지는 얼마나 멋들어지고 정교한 말로 표현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실행할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초등학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하는 것과 실제 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의대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가 강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때로는 장애물에 가로막히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들으면 때로 반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불합리해 보이고 불완전해 보이고 심지어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악한 이들이 선한 이들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가는데 의인들은 고통당하기만 하고 아무리 하느님께 부르짖어도 하느님은 들은 척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우리의 한계는 우리가 오직 눈에 보이는 영역에서만 답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일생이라는 시간적 한계 속에서만 결과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을 내릴 이유도 없고 조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을 쥐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 안에서 당신의 섭리대로 일을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계란 후라이를 하기 위해서 계란을 깨는 순간에 누군가 와서 '아! 아직도 계란 후라이가 안되었어?!'라고 한다면 정말 이상한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라이팬이 달궈져야 하고 기름을 둘러야 하고 그리고 익히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갓 시작한 요리를 두고 왜 완성이 되지 않았느냐고 따져봐야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느님은...

마땅한 사람을 찾는 법 2026년 7월 9일 목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1독서에는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특히나 다음의 구절이 절절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호세 11,4) 우리는 하느님을 막연히 먼 분으로,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있고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충실한 외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할 사도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파견에 앞서 지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을로 가야 하고 마땅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찾아가실 때에 사람을 찾는 법이 잠깐 등장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사무 16,7)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도들 역시도 사람들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사실 마음으로 찾은 그 마땅한 사람을 통해서 일이 진행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뜻 세상을 돌아보면 많은 돈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일을 합니다. 목마른 마음이 영혼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이 기쁨을 표현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찾아오지 않고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드시 찾아갑니다. 의지가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서라도 위대한 일을 해내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놓여 있어도 모든 것을 허비해 버리고 맙니다. 복음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을 자신의 가까이 두는 것은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돈을 주거나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빌어 줍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수용자에 따라서...

우리가 가야할 길

다른 민족들의 길 세속성을 상징합니다. 세속에 속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열렬히 추구하는 상태, 즉 돈과 권력과 명예를 최종 목적지로 두고 추구하는 상태입니다. 그럼 우리 신앙인과는 상관이 없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앙인도 그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근본 선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신앙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 같지만 근본에는 세속에 대한 추구를 언제나 하느님 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신앙을 자신의 삶을 꾸며주는 하나의 생활로 치부하고 생의 위기가 다가오면 언제든지 멀리하고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지금의 자녀 세대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소위 '먹고 산다는 핑계'를 앞세워 신앙을 소홀히 하는 이들과 그것을 두둔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고을 원래는 한 형제였는데 건전한 신앙에서 갈라져 나간 이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SSPX라는 성 비오 10세회라는 전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교를 임명하면서 최종적으로 가톨릭과 결별을 완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하나의 단편일 뿐 수많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계 치유라던지, 하느님의 뜻 영성이라던지 교회 안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왜곡하는 수많은 경향들이 존재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인간 내면의 교묘한 영적 자만이나 교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 스스로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거나 반대로 한 사람을 지나치게 죄스럽게 느끼게 하여 영적 구속 상태에 빠지게 하는 등입니다. 특정 신심에 지나치게 빠지거나 이교적인 가르침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면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이들은 가장 깊은 내면에 영원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인도자가 없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도 있고 교회 밖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본당에서 신부님이 강론 중에 내내 정치 이야기만...

황사영 백서 (한글)

황사영 백서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길 떠났던 사람 편에 각하께서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세월이 지나 벌써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각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덕화가 나날이 융성하시기에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하례 드리는 마음 이기지 못할 듯 합니다. 저희 죄인들은 죄와 악이 깊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헤아림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에게 미치게 하였습니다. 저희 죄인들은 또한 위태로움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면목으로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겠습니까? 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성교가 뒤집혀 엎어질 위험이 있고, 백성이 박해에 걸려 죽을 고통 속에 있는데도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할 데도 없으며, 어진 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모든 것을 헤아려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은혜로운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극한 괴로움에 저희는 장차 누구를 불러야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지 이미 오래고 실마리가 하도 많아서 간단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으므로 다음에 자세히 적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했고, 요한도 들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