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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복잡한 사도직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꽤나 단순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거창한 병원을 세우지도 복잡한 규율을 가진 학교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전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신앙을 주변에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을 살아야 다른 이들에게 그 신앙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부터 신앙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안에 충만한 신앙을 타인에게도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더할나위 없이 복잡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본질에서 갈수록 멀어져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는 껍데기를 신경쓰느라 찐빵 안에 팥이 들었는지 바퀴벌레가 들었는지 거의 신경쓰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행정기관처럼 변해 버렸고 사람들은 복음의 열의 없이 살아가고 그것을 전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가정 안에서도 복음의 빛이 전달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은 여전히 단순합니다. 마치 빛이 밝고 직진성을 지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환경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빛을 '산란'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질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몇 가지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기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기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기

마귀들을 쫓아내기


이 네 가지 사안은 '영적인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는 이 일이 실제로도 일어났습니다. 그의 내면의 영이 치유되는 순간 그 결과가 외견으로도 표현되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다 영적이고 내적인 면모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영혼에 질병을 앓고 있고, 영혼이 죽은 듯이 살아가며, 영혼이 나병이 걸린 듯 고립되어 살고, 심지어는 마귀의 더러운 영을 받아들여 지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아프면 영혼의 본래 기능이 작동을 못합니다. 영혼의 본래 기능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아프면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시늉을 할 뿐 실제로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뒤쫓는데에 모든 시간을 허락하면서도 하느님에게는 구두쇠로 살고 사람들과 언뜻 연합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죄는 영혼을 아프게 하다 못해 죽여 버립니다. 영혼이 죽으면 더는 기초적인 덕조차 추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쾌락이고 이기성 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소진하려고 들기 시작합니다. 


나병에 걸린 영혼은 홀로 고립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덕목인 '고독'을 고립과 착각하면 안됩니다. 고독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위해서 사람들을 피해 홀로 머무는 거룩한 시간이고 고립은 사람들과 있으면서도 그들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유대관계가 하나도 없는 채 세속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 나병이 걸린 영혼들이 있으면 그들은 서로 모여 밥도 먹고 여행도 가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도 신경쓰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완전한 고립의 상태입니다.


마귀의 더러운 영이 들리면 그는 '파괴적'으로 변합니다. 특히 마귀는 '아름다운 것'을 파괴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가장 거룩한 것을 공격하려고 듭니다. 성당 안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흔히들 모여서 사제나 수도자에 대한 험담을 하고 거룩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에게 질투심을 품고 그를 파괴하려고 시도합니다. 굉장히 악마적인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수단으로 복음의 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선포에는 다음의 조건이 따릅니다.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기

- 세속적 의지처가 되어 하느님의 은총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들(전대의 금, 은, 구리, 여행 보따리, 여벌 옷, 신발, 지팡이와 같은 것이 상징하는 것)을 지니지 않기

- 기초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이기

- 각 고을마다 마땅한 사람을 찾고 그의 보호 아래 머무르기

- 그 집에 평화를 기원하기


다시 이 강론의 처음의 주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직의 핵심은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현세의 복잡 다단한 면모로 인해서 그 복잡성을 가중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돌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단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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