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4월, 2026의 게시물 표시

무엇을 믿어야 할까?

수학의 명제는 의심받지 않는다. 1에다 1을 더하면 2가 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의 명제는 곧잘 의심받는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부터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그분의 뜻과 그분이 하시는 일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예컨대 성경을 믿으라 하지만 성경은 곧잘 의심의 대상이 된다. 올바르게 전파된 것인지 올바르게 번역된 것인지. 애시당초 성경이 인간에 의해 짜집기 된 책은 아닌지? 또 교회를 믿으라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바람직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오류, 심지어는 지도자들의 오류를 통해서 사람들은 신앙에서 멀어져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일종의 세뇌와 정신착란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 신앙인은 거대한 집단 광기의 희생양일 뿐일까? 신앙은 수학이 아니다. 신앙은 '의지'와 관련된 것이고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물'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물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맑은' 물이 있다. 오염된 물이 있고 먹지 못하는 물이 있는가 하면 덜 오염되고 더 맑은 물이 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더 맑은 영혼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순수의 절정에 계신 분, 물 자체를 만들어 내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수용은 신앙인에게 가장 첫 단계를 형성한다. 깨끗해질 의지가 없는 이는 순수함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존재의 타락을 체험하고 있는 이들, 그래서 정화의 필요를 느끼는 이들이 더 맑은 물을 찾게 마련이다.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셈이다. 이 첫 갈증으로 신앙에 발을 내디딘 이는 그때부터 여정이 시작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참으로 이 여정을 걷는 이들만이 아는 것이다. 이 여정을 시작도 하지 않...

모두 저마다의 길로 간다

우리는 저마다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마냥 다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작게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부터 이 일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함께 이득을 얻기를 바라기에 회사가 잘 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 일을 합니다. 나아가 이런 방향은 정치색으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이상에 따라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고 그 길을 함께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영혼의 결, 또는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길과는 다르게 영혼의 방향은 오직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하느님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견대로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영혼을 이끌어야 하는 소명을 지닌 이들이 저마다의 인간적 약점으로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은 의외로 뚜렷하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스승을 따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만나를 먹은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아닌 세속적인 이상을 뒤따른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질 것입니다. 그릇된 길을 스스로 선택한 탓입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오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 저마다의 보속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필리포스와 내시는 같은 뱡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들은 마치 소금이 물에 녹듯이 서로를 만나 알아보고 신앙의 정수를 빨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바라는 것을 얻는 법입니다. 신앙을 정말 배우고 싶은 신앙인은 사제에게서 거룩함을 찾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욕구가 가득한 신앙인은 사제를 이끌어 술을 배우게 만들고 도박을 하게 만들고 고급 스포츠를 즐기게 이끌어 버립니다. 그리고서는 마치 자신이 그 사제에게 좋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