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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어야 할까?




수학의 명제는 의심받지 않는다. 1에다 1을 더하면 2가 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의 명제는 곧잘 의심받는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부터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그분의 뜻과 그분이 하시는 일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예컨대 성경을 믿으라 하지만 성경은 곧잘 의심의 대상이 된다. 올바르게 전파된 것인지 올바르게 번역된 것인지. 애시당초 성경이 인간에 의해 짜집기 된 책은 아닌지? 또 교회를 믿으라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바람직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오류, 심지어는 지도자들의 오류를 통해서 사람들은 신앙에서 멀어져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일종의 세뇌와 정신착란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 신앙인은 거대한 집단 광기의 희생양일 뿐일까?


신앙은 수학이 아니다. 신앙은 '의지'와 관련된 것이고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물'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물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맑은' 물이 있다. 오염된 물이 있고 먹지 못하는 물이 있는가 하면 덜 오염되고 더 맑은 물이 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더 맑은 영혼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순수의 절정에 계신 분, 물 자체를 만들어 내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수용은 신앙인에게 가장 첫 단계를 형성한다. 깨끗해질 의지가 없는 이는 순수함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존재의 타락을 체험하고 있는 이들, 그래서 정화의 필요를 느끼는 이들이 더 맑은 물을 찾게 마련이다.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셈이다. 이 첫 갈증으로 신앙에 발을 내디딘 이는 그때부터 여정이 시작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참으로 이 여정을 걷는 이들만이 아는 것이다. 이 여정을 시작도 하지 않은 이가 신앙을 말하는 것은 내 물은 더럽지만 맑은 물이 뭔지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러운 물을 지닌 이는 맑은 물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더러워진 영혼을 지닌 이는 보다 순수한 영혼의 상태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더러운 영혼을 보편화 시키려고 하고 영혼의 정화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을 끌어 내리려고 한다. 그것이 세상이 신앙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다. 그들은 시기에 사로잡혀 좋은 것을 망가뜨리려는 것이다.


영혼이 더러워져 있는 이들은 닥치는 대로 믿기 시작한다. 그들의 더러워진 영혼을 다시 정화하기 위한 수고가 아니면 그들은 다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저마다의 스승을 찾아 그것을 우상화하기 시작한다. 그 대상은 과학이 될 수도 있고 정치가 될 수도 있고 그 무엇보다도 고대의 우상인 돈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이 여정을 시작한 사람의 눈에는 보인다. 어떻게 해야 영혼이 더 맑아질 수 있는지, 어디에 더 맑은 물이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마치 밭에 뭍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다른 것을 다 팔아 그 보물을 얻기 위해 여정을 시작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이해되며 부족한 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을 통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차지한 몫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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