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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이 하는 일 2026년 6월 14일 주일 [(녹) 연중 제11주일]




일꾼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직무의 이름을 갖고 있다고 일꾼이 되지는 않습니다. 의사가 의사 가운만 입고 명찰만 달고 있다고 의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적절한 의료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필요할 때에 자신의 의료 기술을 펼쳐서 사람을 살려야 의사가 됩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그저 신자라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이어야 신자가 됩니다. 나아가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활동 속에서 목자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합니다. 목자는 더러운 영들을 식별하고 그들을 올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장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그 직무를 잃는 것으로 끝이지만 사목자에게 올바르지 않은 영으로 식별받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나아가 사목자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나아가 목자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악을 품고 자행하는 이들과 그저 병에 걸려서 쓰러지고 허약해진 사람들입니다. 둘에 대한 처우는 상당히 다릅니다. 악은 쫓아내라고 가르치시지만 병자와 허약한 자는 고쳐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이전 강론에서 다룬 적이 있으니 이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사도들을 '파견'합니다. 헌데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엇나간 길을 걷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런 이들은 '교회 밖에' 있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이런 이들이 교회 안에 더 많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른 민족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일도 없고 세속적 욕구가 가득한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성당을 마치 자신의 취미활동, 혹은 돈벌이의 일부로 간주하며 사제에게 순명하지 않고 다단계 물품을 팔거나 분탕을 일으키는 일을 업으로 삼습니다. 특히나 이런 이들 가운데 소위 성당의 터줏대감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아가 사마리아인 같은 신앙인들은 엉뚱한 신앙 요소들을 신앙의 본질인 양 착각해서 그것을 열심히 추종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레지오는 나오면서 미사는 나오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 행태가 그와 같습니다. 이들은 언뜻 자신들이 열성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신앙의 본질이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습니다. 이들은 온갖 민간전승에서 비롯한 신앙 행위들을 본당 안에 끌고 들어와 건전한 신앙을 망가뜨리는 데에 일조합니다.



우리는 흔히 '착해져야 한다'는 미명 하에 우리의 범주를 넘어선 이들을 돌보겠다고 나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들을 교화하거나 빛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이끌려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길에 들어서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신앙에 목마른 이들, 이스라엘 집안 사람이지만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은 구원을 찾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엉뚱하게 우리에게 반발하는 이들의 반복적이고 악한 의도의 말에 힘겹게 응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 안에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고 구원을 열망하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아서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꾼이 하는 일은 그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으니 우리가 가진 영적 선물을 거저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람들은 길을 찾을 것이고 빛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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