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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6의 게시물 표시

못마땅하게 여기다

그들이 보려고 하는 것 1. 목수의 아들 사회적 금전적 능력, 지위 2.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출신 배경 3. 그의 형제들 / 누이들 인맥, 관계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예수님이 지니신 거룩한 힘의 출처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 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 남편, 누구 엄마, 누구 딸이라는 식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듣기 힘든 시련으로 작용을 했고 결국 사람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예레미야가 한 일은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려는 시도였고 그들을 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적의 선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소중한 은총의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반복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참된 예언자를 만나면 기뻐하기보다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만일 제가 술을 즐겼다면 술꾼들의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노름판을 좋아했다면 노름꾼들의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을 좋아하고 복음을 좋아하는 이들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예견된 결과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마치 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민족,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총알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지구 위에 살면서도 정작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 천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감지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일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 됩니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은 한 민족을 옹기장이 손의 진흙처럼 주무르십니다. 필요없는 부분이 있으면 떼어내고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전에 없던 진흙에서 떼어와 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손에 있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자신의 생애 동안 벌어지는 일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한계를 지닌 우리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영원 속에서 일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찮게 보이는 것이 나중에는 어마어마하게 위대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지금은 대단해 보이는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세대를 거쳐 가면서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는 분이라 당신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께 신실한 이들과 거짓된 이들이 나뉘게 됩니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외적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 영원 속에서 언제나 올바르게 실행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것인가 아닌가로 나뉘게 됩니다. 참으로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신뢰하지 못해서 조급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뚜렷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명한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선과 악의 분리입니다. 선을 근간에 두고 살아온 이들은 결국 하느님의 ...

처녀 딸이 얻어맞다 2026년 7월 28일 화요일 [(녹)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처녀 딸 내 백성이라는 말은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던 순수한 영혼을 지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런 이들이 세속이라는 것에 상처를 입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는 것을 얻어맞는다고 표현하고 세상의 속됨에 상처입어 가는 것을 참혹한 상처를 입는다고 표현을 합니다. 들이라는 곳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하지만 좋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영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무신론의 사상이 팽배해 있고 사람들은 교회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모습을 칼에 맞아 죽은 자들로 표현합니다. 즉 영혼에 생기가 돌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읍 안은 외부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곳으로 바로 교회 안을 의미합니다. 헌데 그 안에는 '굶주림'과 '병'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나아가 이상한 형태의 신앙이 병처럼 사람들에게 번져 나갑니다. 예언자와 사제라는 특정 직분을 콕 집어 이야기합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단순히 역사 중에 있는 한 나라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두 직분 외에도 많은 직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금이나 장수라고 표현했겠지요.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영적인 현실을 다루는 책이고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직분은 예언자와 사제입니다. 즉,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 교회의 현실과도 비슷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직무를 지닌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건물을 지으라고 하거나 인테리어를 바꾸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임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처녀 딸 이스라엘은 지금도 얻어맞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어맞고 있다...

왜 성경은 좋은 말만 하지 않는가?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해서 찾았다는 내용은 듣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물고기가 걸린 그물 비유를 하면서 악한 자들을 가려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다고 표현하느냐고 거북해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흐름'이 존재해 왔고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갈수록 '지옥'에 대한 언급이 약화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빛으로 이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지, 선하다는 것, 책임있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안정되고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둠을 경계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하고 어두우며 영혼에 크나큰 해악을 입히게 되는 것인지를 올바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태극기를 향해 사이렌이 울리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밤늦게 돌아다니면 잡혀가기도 하고 이런 저런 통제 속에서 살아오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예전처럼 밤늦게 다니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노선에서 신앙은 하나의 고삐처럼 여겨집니다. 성당에 오면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성당은 지금의 시대에는 탈출해야 하는 곳처럼 여겨집니다. 문화는 바뀔 수 있습니다. 제도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시선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분이 뜻하시는 바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거부해도 여전히 좋은 것이고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해도 여전히 옳...

의로움과 영광

우리가 부름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우리의 삶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체크하면 됩니다.  1. 나는 '의로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2. 나는 '영광스러움'의 여정 중에 있는가? 1. 우리의 하루의 삶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어둠에서 정화되어 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내면 속에 하느님이 이끄시는 '의로움'의 갈증이 생겨나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똑같은 욕구에 똑같은 악습에 시달리고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더 어두움에 빠져들고 있을까요? 이 부분을 진지하게 묵상해 본다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이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우리가 영광 속에 들어간다,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도 그것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중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마치 금속에 불에 정련되듯이 뜨거운 시련을 통해서 영혼은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검증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정에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모든 규정을 바르게 따르며, 저는 온갖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 당신의 법 하도 놀라워, 제 영혼 그 법을 따르나이다.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밀과 가라지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오늘 복음은 중요한 부분을 거의 대부분 설명합니다. 즉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종말에 저마다의 행실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설명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가 의인이 되고 누가 악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으면 마치 의인과 악인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이거나 처음부터 악인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골고루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할 일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씨앗에 물을 줄 것이며 어떤 씨앗을 키워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세상에 살지만 여러분이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여러분을 진리로 이끄는 가르침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저는 사제로 살아가지만 제가 보고 듣고 접하는 것 가운데에는 저를 유혹으로 세상으로 이끄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예외없이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별하고 거기에 물을 주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겨자씨가 자라나 나무가 되듯이, 여러분과 저의 영혼 속에 심겨진 씨앗은 자라나 나무가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살지만 그 어느 신부님보다도 더 신심있고 거룩한 평신도들을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룩한 직분을 지니고 살지만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세속적인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섞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지켜 보시다가 결국 우리가 행한 것들에 따라 그에 적합한 결과를 선물하실 것입니다. 성...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 2026년 7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우리는 '힘'이라고 하면 외적인 힘만을 생각합니다. 즉, 돈의 위력이나 권력과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내적인 힘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외적인 힘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즉, 인내가 없기 때문에 쉽게 구타하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식입니다. 내적인 힘, 즉 참을성과 인내가 있고 참된 신심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고, 하느님의 거룩한 정의에 모든 것을 맡길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외적으로 자신의 힘을 표출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사람에게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1. 의인에게 있어서 인자함이라는 덕의 발전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의 실현을 당장에 성급하게 하지 않는 것은 먼저 의인에게 있어서는 그들도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의인의 내면의 '사랑'이 더욱 커져서 심지어는 죄인들에게마저도 그 인자함을 펼칠 수 있기 위함입니다. 2. 죄인에게 있어서 회개의 기회 하느님은 죄인들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대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언제든지 정의를 실현해서 죄인을 멸망으로 몰아 넣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충분히 기다려 주십니다. 그래서 화답송은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보는 데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벌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내면 속에 벌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에게는 침이 있고 그 침에 쏘이면 심하게 아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는 벌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벌이라는 것은 작고 이쁜 날라다니는 것이지만 어른에게는 벌이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신앙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유롭게 선물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내면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긴가민가한 대상입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배를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배고픔 또는 쾌락은 확실한 표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배고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고 나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떻게든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작용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뜻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멀리 이민간 아빠라서 지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 아빠가 한 약속을 철썩같이 믿는 아이는 훗날 아빠가 돌아올 때에 그 약속에 상응하는 응답을 얻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을 선물해 주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가운데에는 얼른 이 미사를 마치고 내 입에 들어올 음식이나 내가 만날 사람, 내가 할 일, 내가 벌어들일 돈에 대한 염려가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성경이 말하듯...

나의 말은 완수될 것이다 2026년 7월 12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한 사람의 말은 그 당사자의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지 아닌지는 얼마나 멋들어지고 정교한 말로 표현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실행할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초등학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하는 것과 실제 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의대생이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가 강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때로는 장애물에 가로막히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들으면 때로 반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불합리해 보이고 불완전해 보이고 심지어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악한 이들이 선한 이들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가는데 의인들은 고통당하기만 하고 아무리 하느님께 부르짖어도 하느님은 들은 척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우리의 한계는 우리가 오직 눈에 보이는 영역에서만 답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일생이라는 시간적 한계 속에서만 결과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을 내릴 이유도 없고 조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을 쥐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 안에서 당신의 섭리대로 일을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계란 후라이를 하기 위해서 계란을 깨는 순간에 누군가 와서 '아! 아직도 계란 후라이가 안되었어?!'라고 한다면 정말 이상한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라이팬이 달궈져야 하고 기름을 둘러야 하고 그리고 익히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갓 시작한 요리를 두고 왜 완성이 되지 않았느냐고 따져봐야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느님은...

마땅한 사람을 찾는 법 2026년 7월 9일 목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1독서에는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특히나 다음의 구절이 절절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호세 11,4) 우리는 하느님을 막연히 먼 분으로,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있고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충실한 외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할 사도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파견에 앞서 지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을로 가야 하고 마땅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찾아가실 때에 사람을 찾는 법이 잠깐 등장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사무 16,7)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도들 역시도 사람들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사실 마음으로 찾은 그 마땅한 사람을 통해서 일이 진행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뜻 세상을 돌아보면 많은 돈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일을 합니다. 목마른 마음이 영혼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이 기쁨을 표현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찾아오지 않고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드시 찾아갑니다. 의지가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서라도 위대한 일을 해내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놓여 있어도 모든 것을 허비해 버리고 맙니다. 복음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을 자신의 가까이 두는 것은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돈을 주거나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빌어 줍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수용자에 따라서...

우리가 가야할 길

다른 민족들의 길 세속성을 상징합니다. 세속에 속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열렬히 추구하는 상태, 즉 돈과 권력과 명예를 최종 목적지로 두고 추구하는 상태입니다. 그럼 우리 신앙인과는 상관이 없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앙인도 그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근본 선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신앙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 같지만 근본에는 세속에 대한 추구를 언제나 하느님 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신앙을 자신의 삶을 꾸며주는 하나의 생활로 치부하고 생의 위기가 다가오면 언제든지 멀리하고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지금의 자녀 세대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소위 '먹고 산다는 핑계'를 앞세워 신앙을 소홀히 하는 이들과 그것을 두둔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고을 원래는 한 형제였는데 건전한 신앙에서 갈라져 나간 이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SSPX라는 성 비오 10세회라는 전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교를 임명하면서 최종적으로 가톨릭과 결별을 완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하나의 단편일 뿐 수많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계 치유라던지, 하느님의 뜻 영성이라던지 교회 안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왜곡하는 수많은 경향들이 존재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인간 내면의 교묘한 영적 자만이나 교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 스스로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거나 반대로 한 사람을 지나치게 죄스럽게 느끼게 하여 영적 구속 상태에 빠지게 하는 등입니다. 특정 신심에 지나치게 빠지거나 이교적인 가르침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면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이들은 가장 깊은 내면에 영원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인도자가 없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도 있고 교회 밖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본당에서 신부님이 강론 중에 내내 정치 이야기만...

황사영 백서 (한글)

황사영 백서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길 떠났던 사람 편에 각하께서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세월이 지나 벌써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각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덕화가 나날이 융성하시기에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하례 드리는 마음 이기지 못할 듯 합니다. 저희 죄인들은 죄와 악이 깊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헤아림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에게 미치게 하였습니다. 저희 죄인들은 또한 위태로움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면목으로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겠습니까? 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성교가 뒤집혀 엎어질 위험이 있고, 백성이 박해에 걸려 죽을 고통 속에 있는데도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할 데도 없으며, 어진 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모든 것을 헤아려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은혜로운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극한 괴로움에 저희는 장차 누구를 불러야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지 이미 오래고 실마리가 하도 많아서 간단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으므로 다음에 자세히 적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했고, 요한도 들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