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보는 데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벌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내면 속에 벌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에게는 침이 있고 그 침에 쏘이면 심하게 아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는 벌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벌이라는 것은 작고 이쁜 날라다니는 것이지만 어른에게는 벌이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신앙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유롭게 선물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내면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긴가민가한 대상입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배를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배고픔 또는 쾌락은 확실한 표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배고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고 나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떻게든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작용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뜻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멀리 이민간 아빠라서 지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 아빠가 한 약속을 철썩같이 믿는 아이는 훗날 아빠가 돌아올 때에 그 약속에 상응하는 응답을 얻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을 선물해 주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가운데에는 얼른 이 미사를 마치고 내 입에 들어올 음식이나 내가 만날 사람, 내가 할 일, 내가 벌어들일 돈에 대한 염려가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성경이 말하듯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들의 전형이 됩니다.
보려는 의지가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들으려는 의지가 없으면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씀은 모든 이의 마음에 공평하게 뿌려지지만 여러 종류의 밭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처럼 그들의 마음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도 맺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때로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내가 일하고 있는 사장의 말도 우습게 여기다가는 내가 큰 코를 다치게 되어 있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을 하찮게 여기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소홀히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웃긴 것은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세속적 욕구는 강해서 그 욕구에 부합하는 목소리는 쉽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점을 보러 다닌다던지, 신앙의 건전한 가르침은 하나도 공부하지 않으면서도 유명한 불교 스님의 강의는 귀를 기울여 듣는다던지 하는 식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내면이 이루어낸 결과를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기회들을 소홀히 한 사람은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반대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싹을 틔워내어 열매를 맺는 사람도 그 열매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 환호송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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