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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길




다른 민족들의 길

세속성을 상징합니다. 세속에 속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열렬히 추구하는 상태, 즉 돈과 권력과 명예를 최종 목적지로 두고 추구하는 상태입니다. 그럼 우리 신앙인과는 상관이 없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앙인도 그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근본 선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신앙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 같지만 근본에는 세속에 대한 추구를 언제나 하느님 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신앙을 자신의 삶을 꾸며주는 하나의 생활로 치부하고 생의 위기가 다가오면 언제든지 멀리하고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지금의 자녀 세대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소위 '먹고 산다는 핑계'를 앞세워 신앙을 소홀히 하는 이들과 그것을 두둔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고을

원래는 한 형제였는데 건전한 신앙에서 갈라져 나간 이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SSPX라는 성 비오 10세회라는 전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교를 임명하면서 최종적으로 가톨릭과 결별을 완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하나의 단편일 뿐 수많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계 치유라던지, 하느님의 뜻 영성이라던지 교회 안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왜곡하는 수많은 경향들이 존재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인간 내면의 교묘한 영적 자만이나 교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 스스로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거나 반대로 한 사람을 지나치게 죄스럽게 느끼게 하여 영적 구속 상태에 빠지게 하는 등입니다. 특정 신심에 지나치게 빠지거나 이교적인 가르침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면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이들은 가장 깊은 내면에 영원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인도자가 없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도 있고 교회 밖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본당에서 신부님이 강론 중에 내내 정치 이야기만 한다던지, 아니면 지극히 피상적인 신앙만 반복적으로 건드리고 있으면 양들은 흔히 영적 영양실조에 이르게 됩니다. 또 바깥의 사람들이 내면에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 자신의 주변에 있는 신앙인들이 그 어떤 초대도 하지 않는다면 그 외교인들의 구원의 문제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올바른 식별이 필요합니다. 앞서 설명한 두 부류의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그 어떤 복음도 선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듣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복음은 언제든지 선물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자가 그들의 길을 걷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세속의 지나친 욕구에 빠져서도 안되고 교회의 가르침을 크게 벗어나는 건전하지 못한 뱡항으로 가서도 안됩니다. 복음 선포자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그들을 괴롭히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주고 영적으로 병들고 영적으로 허약한 이들을 찾아서 고쳐 주어야 합니다.


1독서는 이 노선의 정반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심판을 예견합니다. 그들이 내면 속에 헛되이 세운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들이 모두 사라지고 내면의 교만이 모두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쳐 달라, 언덕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달라 외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지금껏 자랑스러움이라고 믿어 왔던 것들이 모두 수치로 변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가려 달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내면에 죄를 품는 자는 악을 잉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에게 수치가 될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우리가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 들이기를 바라십니다.


언제나 주님 얼굴을 찾아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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