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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한글)



황사영 백서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길 떠났던 사람 편에 각하께서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세월이 지나 벌써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각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덕화가 나날이 융성하시기에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하례 드리는 마음 이기지 못할 듯 합니다.


저희 죄인들은 죄와 악이 깊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헤아림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에게 미치게 하였습니다. 저희 죄인들은 또한 위태로움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면목으로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겠습니까?


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성교가 뒤집혀 엎어질 위험이 있고, 백성이 박해에 걸려 죽을 고통 속에 있는데도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할 데도 없으며, 어진 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모든 것을 헤아려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은혜로운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극한 괴로움에 저희는 장차 누구를 불러야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지 이미 오래고 실마리가 하도 많아서 간단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으므로 다음에 자세히 적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했고, 요한도 들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미약하고 힘이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몰래 두서넛 교우와 당면한 일을 깊이 생각하여 저희 복안을 조목조목 나누어 아룁니다. 읽어보시고 의지할 곳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빨리 저희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괴로운 심정이 뼈에 사무쳐,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의 전능하심과 각하의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으로 기구해 주시고 연민의 정을 크게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편안한 자리 위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성교가 이미 천하에 두루 전파되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성덕을 노래하고 하느님의 교화에 북을 치며 춤추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돌아보건대, 어느 누가 주님의 자녀가 아닌 이가 있겠습니까마는, 지역이 멀고 후미져서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기질이 잔약하여 괴로움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워 십 년 풍파에 늘 눈물과 근심 가운데 있었는데 금년의 잔혹한 박해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이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가엾습니다.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 교난이 있은 후에 아직 특별한 은총이 없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이 장차 이 나라에서 아주 끊어지려 합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간장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중국과 서양의 교우 선배들이 이 위태롭고 괴로운 사정을 들으면, 어찌 불쌍히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바라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각국에 널리 알리시고, 진실로 저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은 모두 강구하시어, 우리 주님의 넓은 사랑의 은총을 본받아, 성교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시는 뜻을 드러내어, 저희의 이 간절히 바라는 정성에 보답케 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목을 늘이고 발돋움하여 오직 기쁜 소식이 있기만 기다립니다. 우리 주교 각하께서는 부디 글로써 다 아뢰지 못하는 저희들을 가련히 여겨 주십시오.


을묘년에 주문모 신부를 체포코자 하다 놓쳐 버린 후부터 선왕의 의심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잠시도 멈추지 않고 철저하게 기찰을 하였으나 아직 신부에 관해서 조그마한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끝내 신부의 종적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화진이라는 자를 시켜, 거짓으로 성교를 믿는다 핑계하고 호중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마침내 기미년 겨울 청주의 박해가 일어나 충청도의 열성적인 교우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최필공 토마스 형제는 중인으로,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세며, 의로움에 의지해서 재물을 멀리하며, 성교에 대한 열성이 지극하여 일반 사람과 다른 뛰어난 풍모가 있는데 불행히 신해년의 박해때 잡혀서 유혹에 빠져 성교를 배반하였습니다. 선왕은 몹시 기뻐서 그를 장가들게 하고 벼슬을 주니, 토마스는 하는 수 없이 순종하여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년에 와서는 집에 들어앉아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통감하며 항상 몸을 바쳐 보속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기미년 8월에 선왕이 갑자기 형조로 불러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신봉하고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토마스는 이때야말로 자기가 바라던 대로 성교를 위해 죽을 때라고 여기고, 마침내 성교의 충효의 이치와 자기가 뼈아프게 뉘우치고 있는 심정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빛나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을 모두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형관은 몹시 놀라고 성이 나서 그대로 임금께 아뢰었는데,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가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려 토마스를 사형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서, 자못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였기에,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이중배 마르띠노는 소론의 일명으로, 경기도 여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용맹과 힘이 월등히 뛰어나고 의지와 기개가 호쾌하였습니다. 전부터 김건순과 생사를 같이할 만큼 친하게 사귀어 왔는데, 건순이 교를 믿어 받들게 되자 마르띠노 역시 믿고 순종하여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는 불꽃같은 열성으로 믿으며, 눈을 바로 뜨고 대담하게 행동하여,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경신년 부활절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가지고, 한 동리 교우들과 함께 길가에 모여 앉아서 큰소리로 희락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고, 이렇게 해가 다 저물도록 계속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원수처럼 지내는 가문의 고발로 그는 교우 열한 사람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중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지마는, 모두 마르띠노의 격려하고 권면하는 힘에 의지하여, 여러 번 지독한 형벌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굳게 버티어, 결국은 석방되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띠노는 본래 의술을 조금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깊지는 못했는데, 옥에 갇힌 후에 혹 와서 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기구하고, 그런 다음에 침을 놓고 약을 쓰게 하여,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서 멀고 가까운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옥문 앞이 저자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 고을 군수는 이것을 막지 않았고, 자기도 병이 있어 와서 약을 물으니, 이로 인해 옥중에서도 날마다 쓰는 것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김건순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들이 혹 마르띠노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열에 여덟 아홉은 고친다고 대답하지마는, 실상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 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하는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옥리가 의서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그가 대답하기를 "내게는 의술을 적은 책이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마땅히 주님을 믿으시오"하였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다시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어찌 배울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마르띠노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없어지지 않는 책으로 족히 남들을 가르쳐서 교를 받들게 할 수 있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갇혀 있는 원요한에게 한 늙은 여종이 있었는데, 늘 옥에 와서 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집안 사정을 늘어놓고는 성교를 그만 두라고 거듭 말하며 꾀었으나 요한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여종의 말이 하도 간절하여 요한이 집안을 걱정하는 기색이 나타나므로 마르띠노는 그 늙은 여종을 노려보았습니다. 늙은 여종은 두려워 감히 말을 마치지 못하고 물러가, 그 뒤에는 다시 옥에 가지 않고 "이생원님의 눈빛이 무서워서 다시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마르띠노는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해설하여 남들에게 교를 믿으라고 권하였는데, 옥졸 한 사람은 마음이 움직여 성교를 믿고 따라서 열성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철신은 남인 대가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근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경학과 예학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는데, 성교가 우리나라에 이르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래가 이름 있는 집안인 만큼, 성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도 역시 심하였습니다. 그의 아우 일신이 신해박해 때에 죽자, 그 뒤부터는 감히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더 심해 갔습니다.


기미년 여름, 그의 고향의 귀신같이 고약한 무리들이 사실과 어긋나는 일을 꾸며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맞서 일이 장차 크게 벌어하게 되었는데,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해석한 덕택에, 간악한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간교한 계획은 더욱 비밀히 진행되어, 서울에 있는 간악한 무리와 결탁하여 경신년 5월에 직접 선왕을 뵙고 아뢰기를 "양근 온 고을에 사학이 극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습니다. 그러나 군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그 군수를 징계하고 문책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선왕은 그들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양근 군수는 책망을 받고 스스로 사퇴하였습니다. 새 군수는 부임하자마자 묵은 사건을 다시 일으키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신은 나이가 많고 체포 후의 일을 두려워하여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아들이 여러 차례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청하였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철신을 불러들이려고 하여, 사건이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왕이 성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또한 신부의 일은 두 나라 사이에 관련되는지라, 만의 하나라도 일이 드러나 알려지게 되면 그 처리가 매우 난감하므로, 을묘년 이래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중히 금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체를 담당 관리에게 맡기고는 그러려니 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방의 박해는 은밀한 명령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부러 모르는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여 신부를 잡아 암암리에 결말을 지어 버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김여삼이라는 사람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형제 셋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근년에 와서 여삼은 냉담하여 성교를 배반하고 무뢰배들과 함께 몰려다녀, 그의 두 형도 이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이안정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좀 있었고, 여삼과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집이 가난하여 늘 보태주기를 원했습니다만, 이안정이 그의 뜻대로 다 들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여삼은 한을 품고 항상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안정이 늘 성사를 받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를 눈치채고 망령된 생각을 하기를, '만약 신부가 다른 사람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라고 권하면 그는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안정에게 권하지 않았으므로 안정은 여삼에게 재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삼의 노여움은 신부에게로 옮겨져서 신부를 모략하고 해칠 마음을 먹고 끝내는 신부님의 일을 포도부장에게 밀고하였습니다.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5~6년 동안이나 몰래 살펴보아도 끝내 알아내지 못하던 판에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마땅히 너를 재물이 넉넉한 관직에 추천하겠다"고 하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캐어물었습니다. 이 때 신부는 골롬바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것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포도부장과 약속하기를, "아무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내 알려 주겠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이 채 안되어 여삼이 마침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약속한 날에 포도부장이 그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헛수고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일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했고, 이안정에게 돈 수십 관을 마련해 가지고 찾아가서 여삼과 화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삼의 원한과 분노가 잠시 누그러졌고, 며칠이 못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니, 각 관청에서는 일이 많아 사건이 더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삼은 이미 밀고를 한 뒤여서 또한 자기 스스로는 그만둘 수도 없었으므로, 늘 못된 무리들과 함께 용의주도하게 서로 의논하여 기어코 해치려고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2백년 전부터 당파가 생겨서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북의 네 당파가 있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다시 나뉘어 두 파가 되었습니다. 그 한편은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 몇몇인데 모두 전에는 주님을 믿었으나 구차하게 목숨을 아까워하여 성교를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성교를 해쳤지마는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을 생각이 있었는데, 그 당파의 사람은 수가 아주 적어서 세력이 몹시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또 한편은 홍의호 목만중 등 진심으로 성교를 해치는 사람들인데, 십 년이래 양편은 서로 깊이 원한을 맺었습니다.


노론도 역시 두 파로 나뉘었는데 시파라는 것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심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당론을 고수하는데 힘써 임금의 뜻에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처럼 되었으나, 당의 형세가 매우 커서 선왕도 이를 두려워하였고, 근년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가환은 문장이 세상에서 출중하였고, 정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뛰어났으므로 을묘년 이전에는 선왕이 그들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이후로는 차차 소외당해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벽파가 몹시 꺼려하여 끝끝내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이가환 등은 성교를 배반하고 성교를 해쳤는데도, 벽파의 여러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사당으로 지목하고 배척하여 온갖 참소와 공박을 다하였지마는, 선왕이 매번 그들을 감싸주었으므로, 벽파가 마음대로 해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왕이 돌아가시자 대를 이은 임금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곧 선왕의 계조모로서 본래 벽파 출신으로, 친정은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를 당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대왕대비는 여러 해 원한을 품고 있었지마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마침내 벽파를 끼고 거리낌없이 학정을 폈습니다. 경신년 11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어, 조정안을 절반 정도나 비게 하였습니다.


전부터 성교를 해쳐오던 못된 무리들이 벽파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시세가 크게 변동되는 것을 보자 요란스럽게 들고일어나서, 크게 일을 저지를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경신년 4월에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여러 교우들이 신공에 부지런히 힘썼고, 회원 아닌 사람들도 역시 자진해 움직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기에 힘썼으므로, 그 해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무럭무럭 감화되어 나날이 불어났는데, 그 중 부녀자가 3분의 2요, 무식한 천민이 3분의 1이었습니다. 사대부 집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


을묘년 박해 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큰 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에, 신부는 전적으로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성으로 일을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로서 입교하는 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대개 우리나라의 법이, 역적만 아니면 사대부의 집안 부녀자에게까지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이로 인해 그들은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도 역시 그 점을 빌어서 성교를 널리 전할 바탕을 삼고자 하여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시니, 교회 안의 대세가 모두 부녀 교우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성교의 소문도 그에 따라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사가 되었으므로 새 임금이 즉위한 후 반드시 제일 먼저 어떤 처분이 있을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처분이 어떠한 것일지는 알 수가 없어서, 신부는 더욱더 삼가고 조심하였고, 교우들은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12월 17일에 형조에서는 포졸을 내보내어 최필공 토마스를 체포해다가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아직 미결로 있었으므로, 이번에 그가 체포당한 것은 뜻밖의 일은 아니고, 또한 그 때는 단속하여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으로 조정에서는 아직 엄중한 금령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비록 경계는 하였지마는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움이 심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19일 성헌당첨례일 새벽에 최토마스의 종제 최베드로가 한길 가에 있는 약방 안쪽 방에서 몇몇 교우들과 함께 경문을 외고 있었습니다.


창문 밖에 마침 투전을 단속하고 다니는 한 관리가 있다가, 창문 안에서 가슴 치는 소리를 듣고 투전의 장단 치는 소리로 알고 창문을 열고 뛰어들었는데 투전이 보이지 않자 한 사람 한 사람 몸을 수색해서 첨례단 한 장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글자를 알지 못해서 무엇인지 모르므로,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서 보였습니다. 그것이 성교에 있는 글임을 안 그들은 교우들을 잡으려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았는데, 다른 교우들은 벌써 다 달아나 흩어졌고, 오직 베드로와 오스테파노 두 사람만 남아 있다가 잡혀서 관가로 들어가 토마스와 같이 수감되었습니다. 이에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김여삼과 장안의 무뢰한들을 앞장 세워서, 안 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찾아 교중이 온통 물 끓듯 요란해졌는데, 마침 세밑이 되어 일이 잠시 잠잠해졌었습니다.


정월 초아흐레 총회장 최창현 요한이 체포 당하고부터 부장들은 밤낮 없이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여기 저기서 잡아가, 체포된 사람이 양청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무식하고 새로 입교한 사람과 여염집 부녀자들이었고, 의지가 강하고 굳센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11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성교를 엄금하였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습니다. 선왕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바른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들으니 사학이 여전하여 서울에서 기호에 이르기까지 날로 점점 더 성해진다고 하니, 어찌 소름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서울과 지방에 오가작통의 법을 분명히 하여, 그 통 안에 만약 사교를 믿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가에 고발하여 정치하게 하여라. 그래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으면 마땅히 역률로 논죄하여 모두 다 사형에 처하고 씨도 남기지 않게 할 것이다. 이에 각처가 소란해지고 환난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서, 교우들은 몸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명도회장 정아우구스티노는 정약용의 셋째형입니다. 전에는 양근에서 살다가 경신년 5월 박해 때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전부터 사교를 믿는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경신년 여름 한 고약한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를 지명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는 이 때 시세가 이미 변화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 스스로 도저히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가지고 있던 성물과 책과 신부의 편지 등을 농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른 집에다 맡겨 두었는데, 그 농을 맡긴 집도 발각될 가능성이 있고,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본 집으로 도로 운반해 오려고 했으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임토마스라는 사람을 시켜 나무 장수로 가장하고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서, 19일 석양 무렵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땔 나뭇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한성부의 별육 단속하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것이 밀도살한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하여 임토마스를 관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책과 성상과 신부의 편지였으므로 한성부의 관리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농과 사람을 다 포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것과 같아 환난이 이로 인하여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책을 넣었던 농이 압수된 이후에 교우들은 모두 놀라 몸을 떨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했는데, 십여 일이 지나도 아무런 동정이 없어 조용하였습니다.


2월 초에 포도대장 이유경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고, 새로 임명된 신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차 있던 배교한 사람들을 죄다 석방하고 오직 최토마스 형제와 최요한과 임토마스만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장차 장살할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멀리 귀양보낼 의논을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외부에서도 검거가 잠시 중지되니 교우들은 기뻐하였고, 이대로 아주 아무 일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이 때 소북의 박장설, 노론의 이서구, 남인의 최현중 등이 계속해서 상소하여, 극단적으로 성교를 비방하면서 역률로 논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울러 신대현이 교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을 죄로 몰아 논란하였습니다. 대비가 크게 노하여 신대현을 이조에 가두고, 포도청에 가두어 두었던 네 사람을 금부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조정의 신하와 역적의 죄는 금부에서 다스리고, 포도청에서는 오로지 도둑을 관장하고, 서민의 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다 서민이어서 포도청에 수감되어 있는 자는 도율을 적용 받고, 금부로 옮겨간 자는 역율로서 논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2월 초아흐렛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금부로 하옥시키고, 11일에는 권철신, 정약종을 체포하였으며 한편, 포도청에 단단히 경계하여 전에 석방한 사람들을 모두 다시 체포하게 하고, 아울러 여주와 양근에 가두어 둔 여러 사람을 금부로 압송해 오니, 서울과 지방의 이름 있는 교우는 한 사람도 이 난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나졸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고 널려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의 옥은 모두 빽빽이 차서 더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24일 골롬바의 온 가족이 체포되었고, 그 후로 사대부집 부녀자도 체포된 이가 많았습니다만 자세히 들은 바는 없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가 관가에 이르러, 관리가 농 속의 책의 내력을 묻자, 아우구스티노는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리는 농 속의 편지를 내어놓고 하나하나 캐어물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사람을 보내 가족에게 묻기를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단지 신부의 이름과 있는 곳만 말한다면 절대로 죽을 까닭이 없는 것인데, 독한 매질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너희들 가족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대로 말하여라." 하였지만 가족들은 한결같이 모두 모른다고만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판결하여 26일에 아우구스티노와 최요한, 최토마스, 홍프란치스코사베리오, 홍낙민, 이승훈, 여섯 사람을 모두 참형에 처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아홉 사람을 참형에 처하였는데, 여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골롬바이고 다른 두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남자 여섯 사람 역시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최베드로 등인 것으로 짐작되나, 소문으로 전해 들은 말이 정확하지는 않아, 함부로 단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여주 양근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도로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목베어 죽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낱낱이 아뢸 수 없습니다. 총회장 최창현 요한은 중인으로, 을묘년에 순교한 최마티아의 족질입니다.


그는 참된 가르침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몸가짐이 편안하고 화목하였으며 언행을 공정하게 힘써 20년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은 간단하면서도 정의로워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을 한번만 보아도 자기가 당면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이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몇 마디 말을 더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리게 하였으며, 도리와 강론도 자세하고도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비록 예사롭게 말하며,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듣고 싫증이 나지 않고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심의 유익함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가 천명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므로, 남보다 뛰어나거나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서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 사이에서는 호를 관천으로 불리었습니다.


조화진이 충청도를 염탐하여 최관천이 교인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단지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러 최요한은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으로 피해 있다가 신유년 정월 초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를 하였는데,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부장을 인도하여 와서 덮쳐,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0여 일 후에 치도곤 열 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그 모양이 마치 죽은 사람 같더니, 매질이 끝난 다음 관리가 그의 죄목을 헤아리자, 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관리가 말하기를, "네가 부모에게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소?" 하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명령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뒤에 아무런 소식을 못 듣겠더니, 정아우구스티노와 같은 날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 였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성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고, 무엇에서나 자상하고 세밀한 것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선도를 배워 오래 살 생각이 있어서, 엉뚱하게 천지개벽설을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변하고 바뀔 때에는 신선도 역시 없어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이것도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닐 것이므로 배울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성교를 듣자 그는 독실하게 믿고 힘써 실행하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구들 중에서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 드물었는데, 오직 그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사를 이야기함에는 서툴렀으나 성교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비록 병들어 괴롭거나 굶주림을 당했을 때에도 그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혹 한가지 조그만 이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비록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나 묵상의 공과를 그치지 않았으며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보면 혀가 굳고 목이 아프도록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면서도 조금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비록 아무리 어리석고 둔한 사람이라도 그와 있으면 깨치지 못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찍이 그는 교우들 가운데 무식한 이들을 위해 우리나라의 한글로『주교요지』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널리 성교의 여러 가지 책에서 인용하고 자기의 의견을 보태서 지극히 쉽고 분명하게 설명하여 어리석은 부녀자나 어린아이들이라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한군데도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도 이 책이 이 나라에서 꼴과 땔나무보다도 더 요긴하다 하여, 간행을 인준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는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쌓은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으로 생활화되어 매번 교우를 만나면 안부 인사 정도만 하고, 강론을 시작해서 종일토록 힘써서 미처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혹 자기가 아직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알게 되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해서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혹 신심이 식어버려, 태도가 분명치 아니한 사람이 강론을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서운해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별의별 도리를 다 물어도 그는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고 말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데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다 차례가 갖추어져 논리가 어그러지거나 혼란하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뛰어나 오묘함을 넘어서며, 자세하고도 정확하여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여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덕망은 관천에게 미치지 못했지마는, 성교의 이치에 밝기는 관천보다 나았습니다. 그는 또 천주님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본래 크고 광활한데,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있어 온전히 논한 책이 없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요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부문별로 나누고 모아서 책이름을『성교전서』라 하였습니다. 뒤에 성교의 교리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남겨주려고 하였는데, 초고가 반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박해를 당하여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니 관리가 왕명으로 심문하였는데 그는 성교의 진실한 이치를 분명히 진술하고 성교를 금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크게 노하여 왕명을 반박한다고 하며 대역부도의 죄로 논죄하였습니다.


그는 옥에서 끌려나와서 함거에 올라 형장으로 가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대심판 때에는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정한 기쁨으로 바뀌고 당신네 기쁨과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니 당신들은 꼭 그렇게 서로 웃지는 마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처형 받기에 앞서 주위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들은 두려워말고 후에 본받아서 행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칼로 한 번 찍으니 머리와 몸이 반으로 잘렸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서 십자 성호를 긋고는 조용히 다시 넘어졌습니다. 최필공 토마스와 함께 처형당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2세였습니다. 최토마스는 나이가 들고 병이 많은데다가 옥중에서 오래 시달린 끝에 이미 지쳐서 수레에 오를 때에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형장 가까이에 이르자 비로소 얼굴에 기쁨이 나타났습니다. 맨 먼저 처형당했는데 이 때 나이 56세였습니다.


홍교만 사베리오는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현에서 살았습니다.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뒤늦게는 경학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에서 성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고향의 이웃 사람에게 성교를 권하고 감화시켜서, 한 고을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이 정아우구스티노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이로 인해 전부터 남들의 비방을 받아왔는데 이 때에 잡혀서 순교하였습니다. 홍낙민 바오로는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입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는 이승훈, 정약용과 벗이 되어 지냈습니다.


갑진년 을사년 사이에 성교를 믿고 따르기 시작하여 열심으로 성교의 도리를 밝히고 큰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과거 보기를 중단하지 아니하여 기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 선왕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배교하였는데 자못 신앙의 외형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함께 배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전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지마는 바오로만은 염경과 재 지키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을묘년 성사를 행할 때에는 보례를 받아 고해를 준비하였으나 미처 판공할 때가 이르기 전에 박해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한영익의 고발에 들어 있어서 또 선왕에게 배교하라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후로부터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지켰으며 밖에 나갔을 때도 세속을 거스르지 않고 순순히 따랐습니다. 기미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지마는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와서 열성이 약간 소생하여 장차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가려 하였으나 이 거룩한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함께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옥안의 사정을 엄중히 비밀에 붙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짐작컨대 그의 죄명은 본래 중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만약 잡혀가서 배교하였더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을 것인데 참형을 당하기에 이른 것을 보면, 그가 성교를 거스르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이가환의 생질이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올랐고 본래부터 학문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좋아하여 포의로 있던 이벽이 크게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이 때 이벽은 몰래 성교에 관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승훈은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계묘년에 이승훈이 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이 은밀히 부탁하여 말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천주당에 서양 사람인 선교사가 있으니 자네가 가서 찾아보고 신경 한 부만 구해달라고 하며, 아울러 영세 받기를 청한다면 그 서양 선교사는 반드시 크게 사랑할 것일세. 그러므로 반드시 기이한 물건과 좋은 장난감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되 그냥 돌아오지는 말게" 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영세를 청하니까 여러 신부들은 영세에 필요한 성교의 요점과 이치에 밝지 못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오직 양신부만이 힘써 주장하여 세례를 주고 더불어 성교에 대한 책을 많이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으로 돌아와 이벽 등과 함께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그 책을 읽어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친한 친구들에게 권하고 교화시켜 당시 이름난 선비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그들은 승훈을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습니다. 뒤에 그의 아버지가 성교를 엄중히 금하고 나쁜 친구들은 마구 그를 비방하였지만 승훈은 오히려 참아 견디며 성교를 받들었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 가을에 음직에 임명하여 벼슬이 평택 현령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 여러 번 성교를 헐뜯는 글을 썼으나 다 자기의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박해가 일어나 승훈은 두려워서 다시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성교에 대한 책을 전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의 성교에 대한 공박과 배척은 반드시 그 죄가 승훈에게로 돌아오기 마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왕은 매번 그를 두둔하고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승훈은 겉으로는 비록 세속을 따랐지마는, 혹시 옛날에 함께 신앙을 지키던 벗을 만나면 간절한 정을 못잊어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나려고 생각하다가 이에 이르러 화를 입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교에 관한 서적을 전한 죄가 있어서 비록 다시 배교한다 하더라도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교를 위한 죽음인지 아닌지는 마땅히 앞으로 사실을 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가환은 어릴 때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해서는 풍채가 늠름하고, 태도가 대단히 훌륭하였습니다. 문장은 온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뛰어나 마치 신의 경지와 같았습니다.


또 천문학과 기하학에 정통하여 일찍이 그는 탄식하며, 자기가 죽고 나면 이 나라에서 기하학은 그 근본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의 학문을 다소 믿던 그는 매번 하늘을 쳐다보고 속으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와 같이 크고 넓게 깔린 모습에 어찌 주재하는 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느냐 고 하였습니다. 서른 살이 넘어서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선왕이 그 그릇의 큼을 알고 중히 여겼었습니다. 갑진, 을사년 무렵에 이가환은 이벽등이 성교를 믿고 따른다는 말을 듣고 책망하며 말하기를 "나 역시 서양 서적 몇 권을 보았는데《그의 집에『직방외기』『서학범』등이 있었다》기문벽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단지 내 식견은 넓힐 수 있을 뿐이로되, 어찌 그것을 믿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서 하찮은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벽에 이치에 의거하여 답을 하니 가환이 말이 막혀 마침내 책을 가져다 자세히 읽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벽은 기본 교리책 중 몇 가지를 주었는데, 그 때『성년광익』한 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성스러운 기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가환은 기어코 달라고 하였습니다. 가환은 이벽이 그때 가지고 있던 성교 서적을 모두 가지고 가서 정신을 가다듬어 되풀이해 읽어보고는 성교를 믿기로 뜻을 결심하고 이것은 진리요 정도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이 책 가운데 한 말은 다 하늘을 모함한 것일 따름이요, 하늘을 업신여긴 것이니 서양 선교사가 바다를 건너와 전교하지 못하고 마땅히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제자들을 권하여 교화하고 몰래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토론하며, 상당히 열심이었습니다. 이 때 이승훈 등이 감히 성사를 행하였는데 가환은 다른 사람에게 권하여 그에게 영세를 받게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신이 되어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영세를 받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세가 어려워짐을 보고는 마침내 공과조차 폐지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을 받는 사람은 가환의 일가친척들이 많았으므로 성교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항상 그를 교주로 지목하여 배척하였습니다.


신해년 박해때 그는 광주 부윤이 되어 성교를 많이 해침으로써 자기를 변명할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교우에게 도율을 적용하여 다스리는 것도 가환으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신해년 이후에 선왕이 남인을 많이 등용하자 가환은 기회를 타 여러 높은 벼슬을 역임하고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을묘년 세 사람이 순교한 후에 악한 무리들은 신부의 일은 모르고 그 죄를 이승훈과 이가환에 뒤집어씌우고, 글로써 번갈아 공격하였으므로 선왕도 어찌할 수 없이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가환을 충주 목사로 좌천시켰습니다. 충주에 어떤 교우가 있어 전부터 남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며 협박하여 배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교우에게 주뢰를 사용한 것도 역시 가환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관기를 첩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짓은 다 자기에게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버림받고 다시 등용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집에 들어앉아 글을 짓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본래 성교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을 권유하여 감화시켰는데, 혹 성교에 관한 책이 탄로 나도 가환은 조사하고 금지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무오년과 기미년 사이에 그는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자기의 소신을 말하기를, "이것은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 것과 같아, 치면 칠수록 더욱더 일어나는 법이오. 주상께서 아무리 금하려고 하시나 끝내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오히려 스스로를 변명하고 죄를 승복하지 아니하였으나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 평시에 그를 원망하고 시기하던 자들이라 기필코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하므로, 그 스스로도 끝내 면할 수 없음을 깨달아 마침내 본심을 인정하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던 중 그만 목숨이 끊어졌는데, 이 때 나이 60세였습니다. 여섯 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권철신도 역시 매를 맞고 죽었는데 그가 성교를 위해 순교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널리 탐지하여 알아낼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최필제 베드로는 자가 자순인데 최토마스의 종제입니다.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는 늙어, 약을 팔아 살아갔는데,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용하였습니다. 진실하고 중후한 표양이 순수하게 얼굴에 나타나므로 사람들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최토마스도 의지가 높고 기개가 뛰어났지마는 항상 베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비록 나이가 적은 아우이지마는 모든 일은 다 그에게 물어 본 다음에야 행하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최토마스에게 친동생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교를 헐뜯고 배척하며 교우들을 차례로 돌아가며 욕했지마는 오직 최필제 베드로에게만은 감히 헐뜯어 나무라지 못하고 항상 천주교 신자 중에서 오직 자순 한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그밖에는 취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주신부도 일찍이 그에게 탄복하고 칭찬하여 말씀하시되 "부부가 정결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자순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 갈수록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체포된 후 그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그 아버지도 천주님을 믿어 영세를 받은 후에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최베드로는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청에 호소하여 말미를 청하였는데 관청에서는 돌아가 장례를 지내라고 하며, 다시 말로 눈치를 주어 도망가게 하려고 하였으나 베드로는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바로 기일 안에 옥으로 돌아가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였는데 이때 나이 32세였습니다. 최베드로는 일찍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제각기 자기의 소원을 말할 때 그는 참형 당해 순교하는 것이 자기의 더 없는 소원이라고 말하였는데 결국 그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최베드로는 매를 못 이겨 배교하였지마는 관가에서는 석방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다시 성교를 설명하고 사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못 확실하지 아니하여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김건순 요사팟은 노론 대가의 자손입니다.


집이 경기도 여주에 있었고, 그의 선조 상헌이 국가에 큰 공이 있었으므로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아 나라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김요사팟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하고 뛰어난 데가 있었습니다. 아홉 살 때 선도를 배울 생각을 하였고, 어려서는 글방 훈장에게『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라는 대문에 이르러 선생에게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면 멀리하는 것이 옳지 않고, 멀면 마땅히 공경하지 않는 것인데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은 어찌 그렇습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집에 전부터『기인십편』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 책 읽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십여 세 때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좀 자라서는 문학과 경사자집과 의서와 지리 등에 널리 능통하였으며 불교와 노자와 병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열 여덟 살에 양부의 상을 당했을 때는 우리나라 상복이 송나라 선비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써서 옛날의 법을 많이 잃었었는데 요사팟은 이것을 고쳐서 바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세속의 잘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크게 놀라고 의아하여 글을 보내서 힐책하므로 요사팟은 글을 지어 이에 대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근거가 해박하고 넉넉하면서도 문장이 유창하여 이가환이 보고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따라가지도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집안에 있어서는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웠으며 독실하고 공손하여 덕망이 고향일대에 자자하였습니다. 집안이 본래 넉넉하여 재산을 남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면서도 자기가 먹고 입는 것은 검소하기가 가난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 명예가 대단하여 서울에 올 때마다 그를 찾는 사람의 가마와 말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며, 모두들 그를 한 번 만나 보는 것을 아주 특별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는 이마르띠노 등 대여섯 사람과 죽고 사는 것을 같이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강절 지방에 도달하여 북경으로 가서 서양 선교사를 직접 마주 대하고 이용후생의 방법을 많이 배워, 돌아와 우리나라에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대여섯 사람은 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성교를 받드는 사람은 모두가 남인이고 노론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김요사팟은 성교를 몹시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크고 깊었지만 입교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시골에 있는 교우로부터 총령천신상의 상본을 얻어 보고 성교가 술법과 서로 통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마침내 강이천 등과 함께 술법에 종사하였습니다. 강이천이란 이는 소북의 이름난 선비로서 마음 씀씀이가 단정하지 못하여서, 이 나라는 끝내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배우고 익힌 술법으로 기회를 보아 정권을 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런 줄을 모르고 그와 교제하였습니다. 주신부는 김요사팟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 권유하였는데, 김요사팟은 크게 놀라 감동하고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이 스물 두 살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와 함께 은밀히 친했던 친구들이 다 입교하였는데 오직 강이천만이 온전히 믿음을 수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몇 달이 안되어 강이천의 일이 탄로 나서 마침내 옥사가 일어났는데 문초하는 말 가운데 김요사팟이 연루되었으나 선왕이 평소 그의 재주를 알고 있었으므로 마음이 휘도록 두호하시어 요사팟은 화를 면하였습니다. 그는 영세 후에 천주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불꽃같이 왕성하였습니다. 끝내는 집안의 부형들이 알고 극히 엄하게 금지시켰기 때문에, 3~4년 동안 집안에 말썽이 없는 때가 없었으며 이에 따라 비방도 더 심해졌습니다. 김요사팟은 그 외양이 단정하고 지극히 겸손하여 겉으로 보기에 아주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더욱 남들이 공경하고 복종하였습니다. 그가 체포당한 연유와 난을 당할 때의 지조를 지킨 일에 관해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다만 들리는 말로는 처형당하기 앞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했었지마는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기에 버리고 취하지 아니하였소. 오직 이 천주님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한 것이기에 이를 위해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들도 모름지기 이 뜻을 자세히 알도록 하십시오."하고 끝내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었는데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습니다.


김백순은 서울 사람으로 김건순의 족형입니다. 집안이 본래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릴 생각은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선조 상용은 벼슬이 정승이 되어, 숭덕 병자년에 청나라 군사가 강도를 함락시키자 상용은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사당과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서 전조 명나라의 만력 숭정 두 황제를 제사 지냈는데, 해마다 국왕이 병자년에 절의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들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전배의 예를 행했으며, 예가 끝나면 과거를 설치하여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고 이것을 일러 충량과라고 하였습니다. 김백순이 홀로 이 제사에 참례하지 않고 말하기를 "오늘날 제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주나라를 존숭하는 정성으로 이 제사에 참례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만 엿보는 것이니 그것은 매우 참되지 못한 마음으로 행한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참례하지 않는 것이오."하였습니다. 그는 처음 몇 해 동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성교를 헐뜯고 비방하면서 과거 공부를 힘썼는데 세상 형편이 앞으로 위험해질 것을 보고는 벼슬에 나아갈 마음을 버리고 송나라 유학자들의 책을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리학 또한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못하여 온전히 믿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노자와 장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이론을 세워서 친구들에게 강설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은 꾸짖고 책망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롭고 기이하니 반드시 서교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백순은 그들의 꾸짖는 말을 듣고 의심이 나서 이르되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 하니 그렇다면 서교에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교우들과 서로 친하게 어울리며 여러해 동안 그 교리를 판단하고 토론한 끝에 확실히 믿고 탄복하여 계명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감화되어 열심히 믿었으나 단지 그의 아내는 본래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서 항상 남편이 벼슬을 하여 이름이 높아지기만을 바라다가 하루아침에 희망이 끊어지니까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별의별 욕을 다 퍼부었습니다. 게다가 일가 친척과 친한 친구들까지 모두 그를 헐뜯고 꾸짖었으나 김백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외숙조차 와서 달래고 타일렀으나 끝내 어찌하지 못하여 외숙이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마땅히 너와 절교하겠다."고까지 하였으나, 백순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아저씨와 절교를 할지언정 우리 주님과는 절교할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친구들이 모두 편지를 보내 절교를 통고하지 않는 이 없었고, 종중회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축출하였지마는 김백순은 태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나는 천주님이 계심을 안 이래 내 마음이 태산과 같아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건순과 같은 날에 참형을 당하였는데, 백순의 나이 32세였습니다. 그는 성교를 받든 지는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미처 영세를 받지 못하여 세례명은 없었습니다. 이희영 루가는 김건순 요사팟의 아주 절친한 친구인데 처음에 여주에서 살다가 뒤에 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화공으로 성상을 아주 잘 그렸고, 역시 참수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홍필주 필립보는 강골롬바의 전실 소생 아들입니다. 그는 본래 성품이 어질고 착해서 어머니를 따라 입교하였는데 성교를 믿는데 별로 부지런하고 열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신부를 모시고 다닌지 1년 동안 아주 딴 사람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으며, 집에서는 항상 미사를 도와 복사를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니 관리가 신부의 일을 묻고 혹독한 형벌로 다스렸으나 홍필주 필립보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끝내 실토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참형을 당했는데 이 때 나이 28세였었습니다. 강골롬바는 명문가의 일명으로 재주와 분별력이 있었고 굳세고 용기가 있었으며 생각하는 것이 고상하였습니다.


아주 어려서 방안에서 지낼 때에 이미 성녀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아갈 길을 몰라 다른 사람을 따라 부처를 생각하였는데 여남은 살이 되어서 지식이 약간 열리자, 그것이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됨을 알고 다시는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성장해서 덕산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는데 남편이 용렬하여 도무지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답답하여 언제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충청도에 성교가 처음 들어오자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자를 듣고 스스로 헤아려 생각하기를 "천주라 함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이미 바르니 그 도의 이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 하고 책을 구하여 한번 읽어보고는 온 마음을 다해 믿고 따랐습니다.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열심하고 스스로를 이겨내는 것이 뛰어나서 다른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성교를 권하고 감화시킴이 온 가족은 물론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 홍지영은 주관이 전연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이를 권하면 "그래, 그래."하고 아내의 말을 따르고 악한 무리가 헐뜯으면 "옳아, 옳아." 하고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다가도 나쁜 친구들이 또 오면 금방 전과 같아졌습니다. 골롬바는 아무리 힘을 다해도 효과가 없자, 남편과는 일을 같이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신해년 박해때 고향이 소란해지자 그녀는 마침내 논밭과 집을 남편에게 맡기고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고, 지사바가 하는 일에 간여하고 도움을 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을묘년에 영세를 받았는데 신부는 그녀를 보자 매우 기뻐하고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자 교우들을 돌보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5월의 박해 때 그녀는 피신할 계획을 가장 먼저 주장하고 혼자서 주선하여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보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포졸들이 문 앞까지 왔다가도 어긋나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박해 이후에는 신부는 아주 그녀의 집을 거처로 삼았고, 골롬바는 6년 동안이나 성교의 모든 중요한 일을 도와 이끌었으므로 신부의 사랑과 신임이 대단히 커서 아무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롬바는 안으로 신부의 거처와 의복, 음식을 잘 받들었고, 밖으로 성교의 사무를 처리하여 교회 살림과 교회 내의 연락을 주고받음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치고 그 일이 끝나면 집집마다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도록 권유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역시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에게 권유하고 감화시켜, 스스로는 편안하게 잠 잘 때가 드물었습니다.


이치에 통달하고 능란한 말솜씨로 설명해 주어 누구보다도 감화시킨 사람이 가장 많았으며 일처리가 과단성 있고 위엄도 있어, 사람들이 다 조심스러워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니 관리가 신부의 종적을 캐어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양쪽에 늘어선 형리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참형을 당해 순교하였는데 그 때 나이 41세였습니다. 선왕에게 서형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역모로 죽은 다음, 선왕은 서형을 강도로 귀양보냈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가 들고일어나서 그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본래 살던 궁에 머물러 있게 하였습니다. 신해년, 임자년 무렵에 한 여교우가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권유하여 감화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모두 화난의 계기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려했지만, 골롬바는 자진해서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성사를 받도록 주선하고 또 명도회에 가입시켰기 때문에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근심하고 번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에 이르러 일이 발각되니, 그들에게는 사약이 내려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고 강도의 죄인은 성교를 믿지 않았지마는 여기에 연루되어 역시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두 부인의 성과 본명은 자세히 알 수 없고 최베드로 이하 여러 사람의 순교한 날짜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조베드로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홀아비로 곤궁하여 지냈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겨우 생활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나이가 서른에 가깝도록 관례도 못하고 장가도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몸이 부실하여 병들어 늘어지고 잔약하였으며, 외모도 별로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세상일에 어둡기까지 하여 남들이 모두 조롱하고 비웃고, 사람축에 넣지 아니하였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오직 정아우구스티노만이 그의 열성을 칭찬하였습니다. 경신년 4월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여주에 있는 이중배 마르띠노의 마을에 갔다가 마르띠노가 체포당하면서 부자가 함께 붙들렸습니다.


관청에 끌려가서 베드로가 굴복하지 아니하자 관리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네 아버지를 당장에 때려죽이겠다". 하고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는 수 없이 배교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석방되어 옥문을 나오면서 이마르띠노 등 여러 교우들에게 깨우치고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베드로는 다시 마음을 돌이켜 죄를 참회하고 다시 들어가 관리에게 성교를 믿음을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크게 노하여 다시 가두고 석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매번 심문을 당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의례적인 매를 맞았지마는 오직 베드로만은 특별히 가장 많이 가장 혹독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그것은 그 고을 사또가 그 외모를 보고 마음으로 몹시 업신여겨 이러한 자는 쉽사리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도 오히려 그 신앙이 몹시 굳고 단단하므로 미움이 특히 심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옥에 갇혀 있기를 열 한 달 그 동안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동이 매우 많았습니다마는 다 기억하지 못하여 모두 자세히 기록하지 못합니다. 훗날에 마땅히 사실을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고 신유년 2월에 관청에서 다시 엄한 형벌로 고문하면서 억지로 배교하기를 명하니 그가 이르기를 "하늘에 두 천주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소, 한 번 죽는 것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소"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다시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고 며칠 후에 옥중에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이 때가 2월 14일이었습니다. 이루도비코는 충청도에 전교하였다는 죄로 공주에서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배교 중이었는데, 죽을 때 어찌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마는, 감히 성급하게 믿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정산과 예산에도 각각 순교한 사람이 한 사람씩 있다고 말합니다만, 역시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라도는 신해년 이후 10년 동안 박해가 없어서 교우가 두루 많아졌습니다. 4월초에 전주의 유아우구스티노, 고산의 윤프란치스코 등 2백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오직 김제의 한씨 성을 가진 가난한 선비와 전주의 최씨 성을 갖고, 자가 여겸인 상인, 두 사람만이 성품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여 참수 당해 순교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굴복되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배교한 사람들을 모두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 그 수효가 매우 많았는데 유아우구스티노 형제와 윤프란치스코는 영수이기 때문에 바로 귀양보내지 아니하고 서울로 옮겨 가두었고 김토마스는 체포당할 때 자기가 그들과 내왕이 있었음을 스스로 말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그 역시 서울로 옮겨다가 가두었습니다마는 죽었는지 귀양갔는지는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외교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판결을 받고 처형된 사람과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모두 합쳐 3백여 명인데 지방의 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로 사람을 죽인 수가 올해처럼 많은 해는 없었다고 합니다마는 믿을 만한 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휩쓸려 죽은 사람이 누구이고 순교한 사람이 몇인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죽이고자 한 사람은 지위가 높고 글을 잘하는 선비들입니다. 어리석고 천한 백성은 혹 알아도 모른 체 내버려두고 혹 취조하여도 그다지 엄하게 하지 아니하여 장안의 평민들은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많습니다. 2월 보름날 전의 일은 다 저희 죄인들이 직접 본 곳들이라 상당히 자세하게 되어있습니다만 그 뒤의 일은 다만 소문으로 전하는 말을 얻어들은 것이기 때문에 매우 소홀하고 간략합니다. 순교한 이들의 행적은 분명하게 전해 들은 것과 평소에 익히 알고 있는 것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라 그 대강의 줄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함부로 기록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록한 것 가운데도 오히려 진실 되지 못한 점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마땅히 다시 자세히 조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부는 을묘년 이래 늘 골롬바의 집에서 기거하셨습니다. 간간이 혹 다른 곳을 돌아다니시기도 하였는데, 오직 골롬바만이 이 일을 알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박해가 일어나자 어떤 남자 교우가 형세가 매우 위급한 것을 보고 신부가 몸을 온전히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바로 지방으로 내려가서 숨어사는 교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숨을만한, 마땅한 곳 두 군데를 마련하여 놓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골롬바를 보고는 몸을 보호하여 난을 피하게 할 계획으로 신부를 한번 만나보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골롬바가 말하기를 이미 안전한 곳이 마련되었으니 꼭 다시 옮겨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교우는 여러번 간청하였으나 신부를 만나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이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5~6일 후에 화가 일어날 기미가 더욱 커지자 이 교우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가족을 모두 이끌고 멀리 피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가 관청에 잡혀가서 문초를 받으면서 사실을 말하지 아니하자 관리는 골롬바 모자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로 국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말하지 아니하자 이번에는 골롬바의 계집종을 데려다가 주리를 틀어 문초하니 계집종은 그 형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또한 신부의 나이와 얼굴 모습을 말해 주었습니다. 관리가 골롬바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계집종이 이미 다 말했으니 너는 끝내 숨기지는 못할 것이다. 마땅히 신부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골롬바가 대답하기를 "신부가 전에는 우리 집에 있었지만 오래 전에 떠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신부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관에서는 신부님의 용모를 그려 현상 수배하고 각 지방으로 널리 탐문하였습니다. 3월 중순에 신부는 자수하였는데 직접 의금부로 들어가니까 이졸들이 놀라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신부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 역시 천주님의 가르치심을 받드는 사람으로 지금 소문을 들으니 조정에서 성교를 엄중히 금하여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하여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기에 스스로 와서 죽기를 구하는 것이오."하였습니다. 나졸들이 신부를 붙들어 관리 앞으로 나아가니 그가 신부임을 알고 마침내 옥에 가두었는데 다만 양쪽 발에 족쇄만을 하고 형벌과 문초는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부가 옥에 갇혀 있을 때 글자로 문답한 것이 매우 많다고들 하는데 하나도 얻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외교인이 전하는 말을 듣건대 자수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서양 사람이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보다 앞서 여섯 사람의 죽음은 역률로 처단된 것입니다. 신부가 자수한 후 장안 사람들이 서로들 전하여 말하기를 "서양사람이 옥중에서 천주교 교인은 역적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서양 사람이 그냥 죽음을 당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하고 그런 다음에는 죽음을 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허황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4월 보름 이후에 조정에서는 어영대장에게 신부를 군문에 효수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영대장이 병이 났다 핑계하고 사흘을 출근하지 않아 사흘 뒤에는 병났다는 대장을 파면하였고, 새 대장이 임명되어 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나서 저자 거리에 모인 군중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신부는 길 좌우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을 두루 돌아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하여 군졸들이 술 한 잔을 올렸습니다. 술을 다 마시고 나자 마침내 성 남쪽 10리 밖에 있는 연무장으로 갔습니다. 귀에 화살을 꿰고 군졸이 죄목을 적은 조서를 주어 읽게 하였습니다.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보기를 마치고 목을 늘여 형을 받았습니다. 이때가 바로 4월 19일 성삼첨례일 신시였습니다.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닥치고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우레와 번개가 큰 소리를 내며 번쩍번쩍하여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한 교우는 3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4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박해를 피해 길을 가고 있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이상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날 반드시 무슨 범상치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날짜를 기억해 두었습니다. 나중에 신부가 순교했다는 말을 듣고 따져 보니 바로 그 날 그 시간이었습니다.


머리를 닷새 동안 거리에 매달고 밤낮으로 굳게 지켜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뒤에 대장이 명하여 흙으로 덮어는 놓았으나 엄중히 지키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우들이 몰래 묻은 곳을 알아두었다가 후일에 옮겨다 장사지내려고 하였으나 못된 관리가 "이 사람은 매장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청컨대 파내서 드러내 놓아 이슬에 젖게 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상소하였습니다. 대왕대비가 이를 허락하였는데 앞에 묻으라고 명했던 대장이 간하기를 "이미 묻어 버린 것을 그렇게까지 할 것이야 있습니까"하여 별일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지키는 군졸들이 힘들게 지키는 것을 꺼려하여 몰래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몰래 묻은 곳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하였습니다. 형을 집행할 때 형량을 선고하는 관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제주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그 처리 방안을 문의하지 않은 것을 엄폐하기 위한 이유에서입니다.


신부가 순교한 후 박해의 큰 기세는 약간 수그러지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찰과 체포는 일찍이 끊인 일이 없고 옥에 갇힌 사람은 아직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참형을 당할 사람이 또 아홉 사람이 더 있다고 하였습니다마는 전해 들은 말이라 사실인지 아닌지를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신부가 우리나라에 온 직후에 곧 고발한 자가 있어서 이미 선왕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7년 동안 마음으로 조심하고 염려하여 몸을 움츠리지 아니한 때가 없었고 감히 성사를 널리 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사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본래 많지 않고 그 태반이 여자 교우입니다. 지방의 교우와 서울의 상인 중에 열성적인 이가 적지 않았으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극히 드룹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괴로움을 받았지만 참고 견디며 여러 해를 두고 큰 기대를 해 왔는데 세상 형편이 편안하지 않아서 비록 사사로운 집 방안에서도 감히 입을 열어 "신부"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못하다가 뜻밖에 성교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여 목을 거리에 매단 다음에야 신부의 얼굴을 뵈니 10년 동안 애쓴 정성이 하루아침에 헛일로 돌아가 버려 영혼과 육체가 다 함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생사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어 모두 상심하여 삶의 의미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합니다. 저희들이 그들을 보고 위로하여 말하기를 "신부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오로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는데 어찌 널리 베풀어 구제하려고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여러 가지 장애가 되는 일이 많아서 사랑을 참고 드러내지 못하셨는데 이제 이미 순교하여 하늘에 계시어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훨씬 더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지함이나 당신들의 어여쁜 소망이 오히려 전에 비해 배 이상 더해질 것이니 털끝만큼이라도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지마는 그들은 혹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슬퍼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아마도 그 옛날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박해에 있어서 그 참담함과 혹독함이 오늘날 이 나라에서의 박해보다 더 심하였지마는 성직자가 대를 이었고 성사가 끊어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교가 멸망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살아있는 영혼이 모두 구함을 받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세상 형편이 너무나도 달라 그러한 희망이 전연 없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오히려 풀을 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잃고도 오히려 온전히 살아날 수 있지마는 저희들은 아무리 수없이 생각해 보아도 실로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저희 죄인들은 오랫동안 어두웠던 지역에 태어났으나 다행히 천주님의 사람이 되었으므로 항상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의 이름을 높여서, 베풀어주신 특별한 은총의 만분지일이라도 갚으려고 생각하였는데 중도에서 갑자기 이러한 지경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순교자의 피는 우리 성교의 씨앗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나라는 불행하게도 동쪽으로 일본과 가까이 있습니다. 섬나라 오랑캐가 잔인하고 혹독하여 스스로 천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는데,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그것을 논하기를 도리어 잘한 일이라고 하여 장차 본받으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품이 부드럽고 연약하고 법령이 풀어져 느슨해졌으니 꼭 일본처럼 그렇게 각박하고 혹독하지는 않겠지마는 그러나 현재 교우 중에 식견이 높고 의지가 굳센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과 부녀와 아이들을 대강 계산하면 수천 명을 넘지 아니하나 그들을 헤아리고 다스릴 사람이 없어서 떨치고 일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형세로야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십 년이 못 가서 비록 다시 정부의 박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죽기 전에 차마 성교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어찌 본다는 말입니까. 저희들은 금년에 화를 면하였음에 감사함과 두려움이 절실하게 엇갈립니다. 인자하신 은혜로 힘껏 보호하시어 특별히 생명을 보전하였음에 감사드리며, 죄악이 많아서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음이 두렵습니다. 참으로 이 남은 목숨으로 주님을 위해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모자랄 뿐만 아니라 힘도 또한 다했으니 장차 원통함을 머금고 땅속에 묻혀야 하며 한을 품고서 이 세상을 마쳐야 합니까? 슬프고 걱정이 절박한 가운데 누가 저희를 불쌍히 여기며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본 주교 대야 각하의 인자하신 존전에 울며 호소하고 싶으나, 산과 물이 가로막혀 우러러보아도 미치지 못하니 더욱 속이 타고 답답합니다. 장차 어찌하오리까. 저희들은 신부가 자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가슴 아파하는 것 이외에 또 한 가지 크게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이 일이 보고되어 중국 조정에서 들으면 그 루가 북경 본당에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교회 일은 회복할 가망이 없게 될 것이므로 그 때문에 밤낮으로 이 나라에서의 일보다 깊이 근심하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주님의 지극한 도우심으로 근본이 흔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아울러 저희 죄인들도 죽지 않았고 요한도 무사한 것으로 보아 주님의 뜻이 이 나라의 일을 각하께 위촉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희 죄인들이 어찌 감히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모두 하소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은혜를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모두 말씀드리니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모든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가난하고 이 나라 중에서도 교우들이 더욱 가난하여 겨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는 사람은 불과 십여 명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갑인년에 일을 시작할 때 신부를 접대하는 모든 절차를 먼저 기약하고 준비하지 못하여 신부가 이 나라에 도착하신 후에야 바야흐로 일하는 것이 서로 맞지 않아서 일마다 군색하고 막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생소하고 경험이 없는 탓이라고는 하지마는 사실은 가난하고 힘이 없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년에 입교하는 사람이 다소 늘어나고 재력도 전보다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할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온당하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들여서 화난이 이처럼 혹독한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그 태반이 재정의 어려움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금년 박해 이후에 화를 입은 사람은 전 재산이 다 없어졌고 살기를 도모한 사람은 홀몸으로 도망하여 가난한 형편이 도리어 갑인년 이전보다 더 심해졌으므로 설혹 무슨 계획이 있다 하여도 시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일이 망가지고 부서진 뒤이지마는 진실로 재물만 있다면 아직도 할 일은 있습니다. 교우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발각되지 않은 이 가운데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소 있어서 힘을 합쳐 함께 일을 벌일 만합니다. 정세로 말하면 을묘년 이후 해마다 더 어려워졌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왕이 신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기어코 찾아내려 함이었고, 또 하나는 노론이 남인을 꺼리고 미워하여 애써 함정에 빠뜨리려 함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왕이 의심하던 것은 이미 깨어졌고, 노론이 미워하던 것은 벌써 없어졌으며, 교우 중에도 겉으로 분명히 드러난 사람이 다 죽었으므로 금년만 지나면 박해가 잠잠해질 것입니다. 지방으로 말하면 서울에는 비록 오가작통의 법이 있어 교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있어서는 작통법이 몹시 엄하다 하더라도, 교우가 살지 아니하는 곳에서는 통을 만들어도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서 사람들이 다 마음을 놓고 태평하게 발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형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경기, 충청, 전라 세 도는 본래 교우가 많이 있었고, 경상, 강원 두 도는 근래에 박해를 피해 간 사람이 간혹 살고 있으므로 염탐하는 관리가 이 다섯 도를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황해 평안 두 도는 본래 성교를 받드는 사람이 없고 또한 흘러 들어간 사람도 없어서 들리는 말이 없이 조용하여 일반 사람들도 의심하지 아니합니다. 변문에서는 비록 조사와 감시가 있다고는 하나 1,2년이래 전연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차차 조사 감시가 소홀해지고 느슨해질 것이므로 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경륜으로 말하면 전에 믿던 사람들은 모두 널리 드러내기를 일삼았지마는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미래에 대해 꼼꼼하게 준비하고 엄중하게 스스로를 지켜,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입교한 사람은 완전히 성취시키고 아직 완숙하지 못한 사람은 가르쳐 훈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껏 기구하면서 조용히 기회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면 성교를 잘 보존할 수가 있어 아무런 근심도 없을 것입니다. 갑인년의 일에 교우들이 너무 기뻐하고 다행하게 여긴 나머지 엄히 삼가지 못하여 처음에 한 번 실수한 것이 그만 차차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앞 수레가 이미 뒤집혀져,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제 참으로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스스로 잘못하지 않는다면 환난이 일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현재의 형세가 이러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만은 아닙니다만 이것도 다 재물이 있는 연후에야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지역의 성교의 존망과 생령의 생사가 추악한 맘몬에 달려 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재물이 없다고 해서 성교가 멸망하고 영혼조차 죽는다면 그 원통하고 한스러움을 어찌 다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몽매함을 무릅쓰고 말씀을 올려 청하는 것이니 바라옵건대 이를 위해 서양 여러 나라에 사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 성교를 유지하고 생령을 구제할 자본이 된다면 꼼꼼하게 운영하고 올바르게 준비한 뒤에 다시 일어설 은혜를 청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야 각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련함을 도와주십시오. 진실로 이러한 청이 번거롭고 분수에 넘치는 일인 줄 압니다마는 말없는 가운데 있어 구하지도 아니하거나 구하려 하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이는 영원히 죽는 것과 같을 따름입니다.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기에 감히 이렇게 입을 열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몸과 마음이 빈 것을 모두 드러내며 우러러 부탁드립니다. 원하옵건대 각하께서는 위로 자애롭고 선하시어 은혜로우신 주님을 본받으시고, 아래로 가난하고 군색하여 잔약한 목숨을 생각하시어 저희의 어여쁜 소망을 넉넉히 위로해 주시고 저희의 바램을 이루어 주시면 이는 성교는 물론 살아있는 영혼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저희들을 은혜롭게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날 길을 허락하신다면 마땅히 이에 응하고 받들기에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며칠이나 몇 달 동안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잘 조리하여 다스리고 주선하는데 적어도 3년은 걸이지 않을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 다니는 데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머리털이요 또 하나는 말인데 머리털은 쉬 자라지만 말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말만 수월하게 한다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 하나가 먼저 북경 천주당에 들어가서 나이 어린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말을 가르쳐 후일의 소용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극히 타당할 것 같습니다마는 주교님 생각에 어떠하신지요. 만약 허락하여 주신다면 서로 치는 횟수로 은밀히 부르되 어떤 소리로 약속하여 동문으로 기약하고 동문이 불편하면 다시 춘문으로 기약한다면 순조롭게 일을 이룰 가망이 있습니다. 또한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는 중국의 교우로서 열심하고 아주 신중한 사람을 책문 안으로 이사 시켜서 아주 조심하게 하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고 상점을 열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접대하면 오고 가거나 서신을 보낼 때에 별로 힘들지 아니할 것이니 그 가운데 절묘한 것이 있어 말로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막다른 지경에 이른 우리나라 백성에 있어서는 생사의 갈림길이지만, 또한 행하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나라를 우리 신부님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틀림없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열성적이고 신중한 사람들에게 널리 물어 보시고 기필코 이룰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심이 어떠한가 하옵니다.


이 나라는 지금 사방이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기이므로 어떤 일이든지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교황께서 중국 황제께 글을 보내 '내가 조선에 성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들으니 그 나라는 중국에 속해 있고 다른 나라와는 교류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이렇게 청합니다. 중국 황제폐하께서는 조선에 특별히 따로 칙령을 내리셔서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여 마땅히 충성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중국 황조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하게 하십시오.' 하고 이와 같이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성되고 근실함을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것으로 교황성하의 가르침을 안전하게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중국의 현재 형편으로 보아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니 원하건대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에서의 천주님의 은혜는 일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처음부터 전교하는 이가 온 일도 없이 천주께서 특별히 이 진리를 친히 가르쳐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낮추어 임하셨고 계속해서 또한 성사를 베풀어주실 분을 보내주시는 등 여러 가지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 이루 다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금년의 이 벌은 진실로 저희 죄인들의 허물을 다스리려고 하신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이처럼 잔혹하게 파괴된 가운데 특별히 한 줄기 나아갈 길을 남겨 놓으셨음은 분명히 이 나라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시려는 표증입니다. 천주님의 도우심이 이러하니 만약 주님을 섬기는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온힘을 다하여 도모한다면 어찌 재앙을 복으로 바꿀 수 없겠으며, 이 손바닥만한 땅을 구원해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이러함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여 죽음을 참아 이기며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주교 각하께서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시어 속히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듣건대 근년에 중국은 서쪽 지방에 도둑이 자꾸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관군이 여러번 패하고 국토가 날로 줄어든다고 하니 중국 황제는 틀림없이 근심하고 고민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말을 잘 하고 국정을 잘 헤아리며, 황제가 평소에 가까이 신임하는 사람으로 이런 기회를 타서 말씀드리되 편안할 때 위급함을 잊지 아니하고 안전할 때 멸망함을 잊지 아니하는 것이 영원한 이치입니다. 본조는 동쪽 땅에서 일어나 온 세상을 차지한지 지금까지 거의 2백 년에 이르렀습니다. 천하의 대세는 엎어지고 뒤집혀 쓰러지는 일이 항상 있는 법이지만 후세에 와서 일을 그르쳐 불행한 일이 있으면 응당 영고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땅이 외지고 좁아서 있을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조선은 영고탑에서 다만 강물 하나를 격해 있을 뿐으로 인가가 서로 바라보이고 부르면 서로 들리는데 그 땅이 사방 3천여 리입니다.


동남쪽 지방은 땅이 기름지고 서북쪽은 군사와 말이 매우 굳세고 힘이 있으며, 산이 천리나 이어져 있어 목재는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삼면을 바다가 둘러싸고 고기와 소금이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경상도에는 인삼이 지천으로 많이 나고 탐라도에는 좋은 말이 매우 많습니다. 이 또한 모든 생산물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이씨 왕조가 미약하여 겨우 실오라기 같이 끊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대왕대비가 섭정을 하여 세력 있는 신하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므로 정사가 뒤틀리고 혼란하여 백성들은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진실로 이러한 때에 속국이 될 것을 명하여 그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왕래를 터놓아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켜 황조의 근본이 되는 땅을 넓히십시오. 안주와 평양 사이에는 안무하는 관청을 개설하고 왕에게 친히 명령하여 그 나라를 살피고 보호하게 하십시오. 은덕을 후히 베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굳게 뭉치게 하면 천하에 변란이 있더라도 요양과 심양의 동쪽 지역을 근거로 삼으면, 그 사이가 멀고 험난함으로 보호되고 장정을 모아 훈련시켰다가 틈이 생기는 것을 보아 움직이면 이것이 만대의 기초를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들으니 조선의 왕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왕비를 맞이하지 아니하였다 하니 만약 중국 종실의 한 여자를 공주로 삼아 시집보내서 왕후가 되게 하면 지금의 왕은 부마가 될 것이고, 그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스스로 마땅히 황조에 충성을 다할 것이고, 또한 넉넉히 몽고를 견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를 놓치고 계획을 세우지 아니하였다가는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불쑥 일어나서 차지하게 되어 그 나라가 안정되고 군사가 강해지면 한갓 우리에게 유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가까이 있는 환난이 되지 아니할까 염려됩니다. 때가 왔는데도 행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황제께서는 이를 결단하시어 시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중국 황제께서 이를 들어주시고 성교를 믿는 사람이 중간에서 일을 돕는다면 성교가 차차 크게 퍼져서 금지할 수 없을 형세에까지 이를 가능성도 많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교우가 많고 접촉할 길도 넓으니 어찌 황제께 나아가 말씀드릴 방법이 없겠습니까? 곁에서 듣건대, 몇 년 전에 칙사로 온 영학사는 황후의 친척이고 또 각하와도 친하다고 합니다. 그 집 하인 중에 교우가 있다고 하니 혹시 그러한 인연으로 조심스럽게 계획을 실행할 수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어 이 계획을 힘써 주장한다면 황제께서 듣고 받아들이시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까닭 없이 속국이 되라고 명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반드시 한두 가지 죄가 될 만한 허물이 있은 연후에야 이를 구실 삼아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공정하지 못하고 법에 어긋나는 일이 허다하여 감히 하나하나 전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사사로이 시헌서를 만들어 시행한 일과 상평통보를 만든 일, 이 두 가지는 곧 중국 조정에서도 전부터 알면서도 문책하지 아니한 일이므로 한번 이 일을 조사하기만 하면 족히 죄를 나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계획은 원래 중국 황실에 유익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나라에도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이 나라는 형세가 크게 위급하여 결코 오래 지탱하기 어려는데 만약 중국의 속국이 되면 간사한 신하들의 눈흘김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이씨 왕조의 명성과 위세는 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다만 성교의 안정만을 위함이겠습니까? 이것은 나라의 복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현실에 맞지 않아 사정에 어두운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가려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지난해 가르침을 주신 편지에 몇 년 후에는 큰 배를 보내겠다는 분부는 받았습니다마는 지금은 형세가 많이 달라져서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 계책이 있으므로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어찌할 도리 없이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나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가냘프고 약해서 모든 나라 가운데 제일 끝인데다가 이제 태평한 세월을 2백년간이나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전선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자녀나 재물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한 방의 탄환이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 조약만 맺고는 북 치고 춤추며 돌아갈 것이오. 그러나 만약 천주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주님이 주시는 벌을 받들어 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 들여 온 나라에 내리는 벌을 면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나라 전체를 잃더라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자 하십니까?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천주님의 성교는 충효와 자애를 가장 힘쓰는 일로 삼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흠모하고 공경하면 실로 이 왕국의 무한한 복이 될 것이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청컨대 왕은 의심치 마십시오. 합니다.


그리고 또한 서양 여러 나라가 진실 되게 주님을 높이 공경하여 오래 편안하고 길이 다스려진 것을 본받아 동양 여러 나라도 서양 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들이는 것이 매우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배와 사람의 수가 능히 말씀드린 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마는 만약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6천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서양의 상선 한 척이 우리나라 동래에 표류하다가 도착하였는데 한 교우가 배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고서 돌아와 말하기를 "그 배 한 척이면 충분히 우리나라 전선 백 척은 대적할 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그 인간성이 독하고 사나워서가 아니고 실은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한데 이를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할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따르는 것이 고루하여 안다는 것은 오직 송학뿐이므로 조금만 자기와 다른 행위가 있어도 천지간의 큰 변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유하건대 궁벽한 시골 어린아이가 방안에서만 자라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다가 우연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크게 울 것이니 오늘날 이 나라의 광경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의심과 두려움 많으며 어리석으면서도 무식하고 성품이 유약하기가 천하에 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가 자수한 뒤에도 교우들이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오랫동안 감히 형을 집행하지 못하다가 교우들이 어찌하지 못할 것을 확실히 안 다음에야 감히 담이 켜져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의심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의심과 두려움이 아직 가라앉지 아니한 때를 타서 반드시 쳐부술 기세로 대해서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반드시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이치로 깨우치게 하여 그 어리석음을 열도록 충고하면 우리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간에 이로움과 해로움을 비교할 것이요, 위력을 두려워하고 편안함을 원하여 감히 꼭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계획이 비록 어렵지마는 행해지기만 하면 반드시 조금도 허술한 데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행할 만한 형편이거든 힘을 다하여 도모하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과 행동은 실행하기가 어렵고 쉽고 간에 성교에서 내세우는 명분에 부합하지는 않는다고 염려합니다만 저희 죄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서 십 년 이래로 순교한 이가 매우 많아서 심지어 성교의 신부와 국가의 중신들까지도 꼼짝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성교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비록 억지로 역적의 죄목을 뒤집어씌웠지마는 실은 털끝만한 불충의 증거도 잡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어질고 착한 태도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미덥고 진실함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나라의 교우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난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교의 진실된 표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서양은 곧 성교의 근본 되는 땅으로서 2천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해져서 귀화하지 아니한 곳이 없는데 홀로 이 탄알 만한 이 나라만이 다만 천주님의 명에 순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가시나무가 되어 성교를 잔혹하게 해치고 형벌로 성직자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이러한 짓은 동양에서 2백년 이래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이 무엇이 옳지 아니하겠습니까?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치심에 의거하면 전교을 용납하지 않는 죄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도 무겁다고 하였으니 비록 이 나라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인데 다만 지금의 이 계획은 성세를 크게 벌여서 전교를 받아들이게 함에 불과한 것입니다. 백성을 해치지 않고 재물을 빼앗지도 아니하고 또한 인과 의의 지극함을 모범으로 삼으니 오히려 뛰어난 표상일 뿐입니다. 어찌 명분의 아름답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할 것을 염려할 뿐입니다. 어떤 이는 또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그것이 중국에 보고되어 북경 본당에 해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마는 저는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지 가운데 설명하기를 교황께서 일찍이 신부 아무개에게 명하여 조선에 성교를 전하게 하였더니 조선에서는 이를 용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죽이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또 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급히 사절을 보내서 조선의 죄를 중국에 알리고 우리들이 죄 지은 자를 토벌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뜻을 밝히겠다. 고 하면 이 나라는 사사로이 중국 선비를 죽인 죄가 탄로 나서 중국의 문책을 당할까 염려하여 절대로 감히 보고하지 못할 것이니 이 또한 우려할 것이 못 됩니다.


책문 안에 점포를 여는 일은 지금 당장 가장 요긴하고도 시급한 일이므로 빨리 되면 될수록 더욱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밖의 계책도 역시 3~4년 안에 뒤이어 시행하여야 하겠고 그런 다음에야 일의 성공을 바랄 수 있겠습니다. 이 때를 지나면 또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하루를 보내기가 한 해 와 같은데 스스로 행할 힘이 없어, 바라는 마음만 심히 간절합니다. 간곡히 원하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구원하여 주십시오. 금년의 박해에 이름이 알려진 교우로서 화를 면한 사람이 드물고 살아남은 사람도 숨을 죽이고 숨어 엎드려 끊어 없어진 것처럼 보여야만 성교가 보전될 수 있겠으므로 교우들은 혹은 장사꾼이 되어 돌아다니고 혹은 살던 곳을 피하여 다른 데로 이사를 가고 하여 길에서 헤매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재일을 당할 때마다 성교를 믿는 것이 쉽게 드러나므로 감히 이와 같이 우러러 바라오니 무릇 오늘날 우리나라 교우 중에 길가는 사람은 대소재를 막론하고 일체 관면하여 주셔서 그늘에 몸을 가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게 하시어 생명을 보전하게 하심이 어떠할는지요. 어떤 사람은 지난번 고해 때 다음 고해 때까지 한 주일에 이틀씩 대재를 지키기로 허원하였습니다. 박해가 일어난 뒤에 그 사람은 집을 버리고 도망하여 두메산골을 돌아다녔는데 산골 음식이 보잘 것이 없고 또 객지의 형편이 몹시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재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허원하고도 지키지 못한 죄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감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쭙건대 기왕에 지키지 못한 것도 혹 죄가 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주 강생 후 1801년 시몬 다태오 축일 후 1일 죄인 토마스 등은 두 번 절하고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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