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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사람을 찾는 법 2026년 7월 9일 목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1독서에는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특히나 다음의 구절이 절절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호세 11,4)

우리는 하느님을 막연히 먼 분으로,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있고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충실한 외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할 사도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파견에 앞서 지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을로 가야 하고 마땅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찾아가실 때에 사람을 찾는 법이 잠깐 등장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사무 16,7)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도들 역시도 사람들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사실 마음으로 찾은 그 마땅한 사람을 통해서 일이 진행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뜻 세상을 돌아보면 많은 돈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일을 합니다. 목마른 마음이 영혼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이 기쁨을 표현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찾아오지 않고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드시 찾아갑니다. 의지가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서라도 위대한 일을 해내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놓여 있어도 모든 것을 허비해 버리고 맙니다.


복음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을 자신의 가까이 두는 것은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돈을 주거나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빌어 줍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수용자에 따라서 그에게 머무르기도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평화는 마음으로 전해지고 마음 안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대도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고을을 떠날 때에 '경고'가 주어집니다. 발의 먼지를 터는 것은 실제로 발의 먼지를 털기도 하겠지만 일종의 상징성을 나타냅니다. 그 고을에서 묻어올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을, 즉 관계를 털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마음이 멀어져버린 고을의 운명은 처참합니다. 성경에서 흔히 저주받은 동네라고 한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말하는데,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발의 먼지가 털린 고을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처참하다고 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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