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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이해되는 이야기

오늘 복음은 반만 잘라내면 완벽하게 우리의 일상과 맞아 떨어집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앞부분, 즉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부분만 없앨 수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가 늘 하는 짓입니다. 누가 나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지면 그는 반드시 갚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고소 고발도 하고 감옥에도 집어 넣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그렇고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이익을 따지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요구하는 이가 먼저 다른 더 큰 이에게 많은 것을 탕감받은 상태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처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받은 세례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우리는 먼저 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종처럼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망각한 사람처럼 처신한다면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신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두 부류의 신앙인이 나뉩니다. 자신이 먼저 많은 것을 용서받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신앙인과 그렇지 않은 신앙인입니다. 앞선 신앙인들은 일상을 자신에게 허락된 기회로 이해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반대로 후자는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탐욕스러우며 현실적인 이득을 계산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행실대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현세에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내세에서는 가장 정의로우신 분이실 테니까요.

악을 탄식하는 이들

어제 어린이에 대해서 배우면서 하느님의 뜻을 순하게 받아들이는 이라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반대의 케이스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라는 것은 특정 행동의 준수 여부를 가리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에게 가까워지느냐 멀어지느냐를 기준으로 합니다. 죄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성당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의인이 되고 바깥에 머무른다고 해서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가가 더 큰 기준점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점을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우리는 지옥이라는 곳을 상상하기를 그곳에 가기 싫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잔뜩 모인 곳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 지옥은 그들을 잡으려는 선의의 뜻을 모조리 물리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뜻을 완전히 굳힌 상태로 모여든 곳입니다. 즉 그들은 천국에 가기 싫어서 지옥에 모여든 셈입니다. 사실 죄를 짓는 이의 내면은 선한 이들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선한 이들에게는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악인들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선하게 처신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힘든 일이 됩니다. 동네에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자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얼마나 힘겨워할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언제나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누구 흉을 보게 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힘들어 합니다. 1독서는 그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에제 9,4) 성당을 술판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장면을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이면 누군가를 험담하기를 너무나도 즐기는 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그 역겨운 짓을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저마다의 행실로 심판받게 마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