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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2026년 6월 21일 주일 [(녹) 연중 제12주일]




우리가 어린 시절 마음이 안정되어 있었던 이유는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고 싶을 때 먹고 싸고 싶을 때 싸면 그만이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시기는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부족했고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첫번째 시기가 다가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와의 유대관계 속에서 벌어집니다. 우리는 부모라는 인격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웁니다. 그 시기에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가치관을 물려 받습니다. 외적이고 화려한 것에 관심이 많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가치관을 물려받아 외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됩니다. 또 돈을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욕구에 눈을 뜨기도 합니다. 반면 진솔하고 참된 것을 올바른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것이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학교를 가게 되고 친구를 만납니다. 그리고 이내 친구와의 유대관계에 빠져듭니다.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가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친구들의 비행에 동참하기도 하고 또 좋은 친구들을 만나 좋은 뜻을 품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친구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어떤 유행을 따르는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제 이 아이는 성장해서 사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이 생겨납니다. 직장에 따라서, 내가 몸담는 문화에 따라서 그들의 시선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내가 어떤 정치색을 가졌는지가 주변 환경에 따라 중요하게 되고 또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도 신경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신앙인은 이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 어느정도 커서 철이 든 뒤부터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그때부터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의 길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집단이 '신앙적 환경'이기 때문에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 가운데에는 아직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써서 신앙 활동에 참여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사람들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들은 때로 우리를 소외시킬 수 있고 우리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해서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눈을 뜨라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누구를 올바로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안다고 증언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그분을 숨기거나 모른체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겉으로 그런 척 하는 것에 속아넘어가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고 너희도 나를 증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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