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토록 잊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한 마디의 말이나 단 한 번의 경험은 평생을 두고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사실은 하느님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을 두고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다 할 만한 하느님의 체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딱히 기억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기억은 세속의 삶에 기반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라고 부를 만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당을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혹은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가 그 체험의 기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성당 안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 체험을 기반으로 한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은 성당 안에서 자신이 원하던 형태의 것이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성당을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냉담에 빠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러 왔는데 커피가 다 떨어지면 거기에 있을 이유는 없는 거니까요.
하느님의 체험을 한 이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때로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삶이 분명합니다. 일요일에 집에서 쉬어야지 왜 쉬는 날까지 성당에 가야 하는지 세상적인 기준에서만 보자면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과거에는 성당에 가면 현세적으로도 즐길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이유들이 더욱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굳은 '믿음'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향주덕의 삶을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1요한 3,1)
댓글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발걸음은 나를 성당으로 데려 갔지만 굳게 잠긴 유리문 안으로는 들어 갈수가 없었습니다. 넓은 성전 안에서 신부님과 수녀님들만이 띄엄띄엄 서로 멀리 떨어져 미사 드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 때의 시간..
지금은 시간과 요일 별로, 메뉴를 고르듯 선택만 하면 언제든지 참례 할수 있게 되었지만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 드리는 이 미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간절한 것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체험을 한 이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이들 입니다.'
아멘.
건강을 잃어 본 사람은 아프지 않던 평상시의 삶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은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그때서야 후회하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부터 멀리 떠나, 하느님이 없는 삶..
살아있어도 그것은 산것이 아님을 절박하게 깨닫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 처럼 다시 하느님께 돌아온 경험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입니다. 그래서, 신부님 말씀 처럼 '하느님의 체험을 한 이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소중함을 또 잊고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마음에서 빠져나와,
감히 헤아릴수도 없지만, 내가 그분의 십자가 의미를 헤아려 보려는 노력을 할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끊임없이 비추시는 빛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생명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