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신앙인의 맛은 복음에 바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착하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착함을 오해합니다. 착함을 그저 무슨 짓을 하든지 다 받아들이기만 하는 태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착함은 순박함, 부드러움, 온유함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착함은 영혼의 올바른 방향을 의미합니다. 휴대폰을 가지고 밤새도록 놀겠다는 아이에게 그저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착하기만' 한 엄마는 사실 착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방임이고 그것은 사실 착한 게 아니라 나쁜 것입니다. 착한 엄마는 그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런 조치가 설령 아이의 미움을 사더라도 그것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착한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신부는 그저 될 대로 대라고 내버려두는 신부가 아닙니다. 일이 올바로 진행되도록 신경쓰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설령 신자들의 반감을 사더라도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착함은 그저 '부드러움'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방향과 그 방향을 굳게 지키려는 용기와 강직함도 들어 있습니다. 나아가 세속적인 요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과 천진함, 그리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바른 것을 지키려는 정의로움도 들어 있습니다. 결국 착함은 특정한 외적 성향 하나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저 나름대로의 하느님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착한 하느님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고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선으로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훗날 우리는 그런 분 앞에서 올바른 판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이유는 소금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짠 맛은 부패를 막기도 하고 필요한 곳에 감미로운 맛을 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착한 행실이라는 맛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 맛이 없을 때에는 아무리 성지 순례를 많이 다녀도 아무리 고급 성지에 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반복해서 베껴쓰고 신심 활동을 외적으로 한다고 해도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모쪼록 사람들이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올바른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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