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마음으로 사랑하기


혹시 이 주제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
나로서는 계기가 있어서 이 주제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하기는 쉽다.
눈망울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이를 사랑하는 것,
인물이 훤하고 이목구비가 뚜렸한 이쁜 소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미 나의 내면에서 어떤 끌림이 있다.

하지만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건 전혀 미지의 영역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인지하기 위해서 적어도 무언가를 감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
여기에 많은 '속임'이 들어가기도 한다.
마음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들을 우리는 '사랑'한다고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 내면이 썩어 문드러지고 냄새가 나는 것임에도
우리는 '속음' 때문에 그 대상에게 나의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내어주고
결국에는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 '돈'이 있다.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사용의 대상이다. 돈은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물질에 마음을 가져다 바치는 인간들이 있다.)

성급한 감이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감각되지 않는 분,
우리로서는 곧 어둠과 같은, 공허와 같은 분이다.
결국 우리는 어둠과 공허를 마음에 품고 사랑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분명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성급했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사랑스러운 외적인 거리(이쁜 아이, 아름다운 여인, 잘생긴 남자,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등등...)로 그를 사랑하는 것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누구라도 하는 일이다.
문제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다.
이들의 외적인 특징, 외양, 드러나는 성격, 행동양식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이다.
알콜 중독자, 부랑인들, 장애우들(물론 장애우들은 일단 만나보면 그 순수함을 곧 깨닫게 된다. 특히 정신지체 아동들은 하느님이 주신 보석들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꺼려하고 기피하는 수많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사랑의 논리로는 악순환에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이들은 전혀 사랑받을 수 없고,
사랑받지 못해서 그 마음이 더 메말라간다.

이들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인사를 하는 사람에게만 인사를 한다고 해서 그가 칭찬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
'분열'의 길을 걷는 사람은 사랑은 커녕 제 자신도 추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요한 사도의 서간 말씀을 들어보자.

요한1서 4장 20-21절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자.
그때에 우리는 좀 더 확고한 자신감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사랑으로 부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
우리는 '영원'을 선물받게 될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