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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

베드로1서 4장 12-14절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 존재합니다. "억울함"을 동반하는 고통입니다. 나로서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유없는 모함을 당하거나 일이 이상하게 꼬여 나에게 모든 짐이 지워진다거나 하는 등의 상황입니다. 차라리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다면 이성적으로 이해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미친듯이 술을 마셨다면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피지 말아야 할 담배를 계속 태우다가 기관지나 폐에 병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주로 시기심 많은 이들, 타인의 평화를 잠자코 지켜보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서 일어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경우에 오히려 '기뻐하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주장을 조금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면서 별 무리없이 해 나갈 수 있는 일을 하였다고 해서 칭찬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기 힘든 일을 이겨내고 해 내었을 경우입니다. 이는 영적인 면에서도 고스란히 적용이 되어, 늘 하던 기도를 한다고 칭찬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공연히 나를 미워하는 이들 앞애서 더욱 주님의 사랑을 증거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상급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이는 사랑 가운데 최상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하느님 아버지가 지니신 사랑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반항하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은 마땅히 그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떠올려야 하는 사랑의 모습이고, 성체 성사를 통해서 창조주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아가 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먹히기까지 하는 사랑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마음에 담아두고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을 품게 되고 저절로 '하느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억울함"이 다가왔을 때에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왜냐면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성령이 내리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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