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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품식을 앞 둔 두 분을 기억하며...


서품식 전날,
작년에 서품을 받은 동기 신부님들과
저녁을 함께 하고는 늦게 들어온 형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은 자기 동기 신부님들의 걱정거리들을 들고와 나누었다.
1년차 보좌때면 늘 하게되는 '주일학교'와 '교리교사'들 걱정이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힘들고 잘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 맞다.
힘들고 잘 안된다.
사방 팔방에서 '공부'하라고 죄어드는 애들을 주일까지 모아다 놓고
'교리'라는 이름의 또 다른 형태의 공부를 시키니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이런 시도도 해 보고, 저런 시도도 해 보게 된다.
내가 보좌 때에는 '가톨릭 스카우트'도 해 보고(지금은 벌써 사라졌단다.)
또 어느 신문 기사에서는 주일학교 교리를
'영어 성경 읽기' 등등으로 세상적인 기대에 발맞추어 운영해 보기도 한다고 했었다.
요즘이라고 상황이 뭐 그리 다르겠는가?
마치 쳇바퀴 돌듯, 이런 걸 시도해보고 안되면 저런 걸 시도해보다가
어느새 보좌 임기가 끝나면 새로운 보좌가 또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굉장히 원론적인 대꾸를 했다.
'형, 신부가 열심히 살면 다 된다.
신부가 거룩하게 하느님 가까이 살면
모든 게 바로잡히게 된다.
내가 봤을 때는 이 부분이 소홀해서 그런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 메말라 가는데,
그걸 채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거다.
신부가 거룩하면,
가정의 부모들이 거룩해지고,
그러면 절로 신앙교육이 이루어질거다.
미사 거룩하게 집전하고, 강론 열심히 준비하고,
사람들이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게 도와주면,
아마 나머지는 저절로 올바로 서게 될거다.'

많은 신부님들이 세상의 다양한 요구에 발맞추려는 시도를 한다.
참으로 좋은 시도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걸 캐치해서 내어주면
당연히 자기 관심사에 따라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세상이 작정을 하고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려는 노력에는 따라갈 수 없다.
'무한 도전'을 아무리 흉내내봐야,
교회의 결과물은 '유한 도전'인 것이다.

교회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복음 선포'이다.
이 '복음 선포'라는 단어를 많은 이들이 곡해해 놓아서,
무턱대고 성경이나 읽고 길거리 나가서 거리 선교라도 해야 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진정한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로 다가서려는 우리의 마음과
그 안에서 나 자신의 진정한 해방(어둠과 죽음에서의 해방) 체험,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한 이웃의 해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걸 설명하려면 또 한 테마가 소요되기에 여기까지만…)

교회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사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셨고,
사람들은 그 '사랑의 하느님'에 굶주려 있다.
눈으로 드러나는 일을 잘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세상 것들은 실컷 쌓아봐야 무너질 뿐이다.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쌓아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완벽하게 정돈된 주일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제로서 오늘 하루 나의 거룩한 향기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제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느끼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오늘 하루는 사람들의 '해방'을 이루는 하루가 되고,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지 않은지를 고민하라.
거룩한 사제들, 예수님을 닮은 마음 따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제들이 되시길…
우리 신부님들 또 한 번 화이팅.

그리고 오늘 서품을 받는 마성우 요한 부제님과 김주현 알베르또 학사님도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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