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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6의 게시물 표시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고쳐 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는 이들의 범위는 당신이 사는 영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영역에 고착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얼마든지 외부에서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영역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예언자는 꼴사나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영역을 넘나듭니다. 그런 가운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 예언자는 자신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것을 베풀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나아가 예언자는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지 동네의 유지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모습들 중에 하느님에게서 어긋나는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죽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로 예언자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처럼 느낍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오던 일들을 예언자가 막아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자를 죽였고 죽이려 들고 죽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하느님의 비호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순간까지, 그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자신이 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벼랑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납니다. 저 역시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밀어붙였고 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사목을 계속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허락하실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까지 묵묵히 제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믿는 이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되었고, 엘리사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파견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서 구원의 표지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납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목마르신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르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그분의 육체적 필요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만일 그분이 육체적 필요를 뒤쫓아 다니실 것 같았다면 애시당초 십자가 위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감과 적개심, 살인 의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리 알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목마름은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연히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화 중에 자꾸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생수를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목마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갈증을 채우는 물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물을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서 달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그 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결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온갖 기적을 하시는 분이 그저 그에게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목말랐던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육체의 식량을 가져오고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믿게 데려옵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목마를까요? 저마다 목마른 것을 찾게 마련이고 그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목마르지 않은 이를 아무리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아 본들 그는 결국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목마른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 놓아도 결국 하느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오다

광야에서 물을 얻을 수 없고, 더군다나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상식입니다. 모세는 사실 양측에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 말이 안되는 요구 앞에서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더 힘을 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위를 쳤고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순응하는 이는 그 열매를 얻게 됩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일이 이루어집니다. 본당에 나와보면 여러가지 현실들이 보입니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수십년간 쌓여 온 그곳 만의 고유한 어려움들을 해결할 가능성은 0퍼센트에 수렴합니다. 헌데 하느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바위'에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그 바위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바위는 물을 꺼낼 수 없습니다. 바위 안에는 내어줄 수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일이라면 가능합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황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축이고 그들 앞에 하느님께서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야말로 '광야'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목말라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적 갈증을 채워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제들은 바위 같습니다. 더이상 나올 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위태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하느님 앞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이 직분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러면 그 순간 물이, 생명의 물이 그에게서 터져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분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를 찾아 다닐 것입니다. 교회는 이 메마른 광야의 시대에서 바위를 쳐서 사람들에게...

제정신이 들다

둘째 아들은 이미 이 순간부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다만 그의 현실은 아버지의 집 밖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때부터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이 순간부터 아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가 다가오기 시작하는 순간에 오히려 그에게 달려갑니다. 그가 제정신이 들기 전에는 그를 붙잡아 본들, 그에게 달려가 본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떠나는 그를 말리지도 않았고 멀리 있을 때에 방문하지도 않습니다. 제정신이 들기 전의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죽었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첫째가 문제입니다. 그가 '화를 내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아버지 밑에서 '종처럼' 일하는 자신을 돌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를 타이릅니다. 첫째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선물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것이 부당하다 생각하며 자신들이 예수님을 보낸 하느님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줍니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건 그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