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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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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하는 자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뭔가 엄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시고 가만히 있지 말고 몸을 놀려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일에 매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달린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면 그 엔진의 힘이 무슨 소용이고 그 차의 온갖 성능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비록 차는 보잘 것 없어도 목적지에 도착하게 도와주는 차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일에 대해서 올바른 묵상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서 일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자기 양식을 버는 일'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사실 우리가 바치는 주임의 기도 안에서도 '양식'이 나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우리는 매번 기도합니다. 그 양식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성경이 말하는 양식은 단순히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이 아니라 영혼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양식을 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그곳에 온 이들을 먹이기 위해 분주히 애쓰고 있었고 마리아는 주님 발취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양식을 벌고 있는 이는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순간은 바로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양식을 버는 일이 됩니다. 비슷한 예로 성당에서 전화받는 이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급한 전화는 성당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무질서한 삶'이 됩니다. 세상에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없습니...

거만한 자들 / 악을 저지르는 자들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이들입니다. 거만함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거부하는 내적 속성이 됩니다. 마치 비가 내리면 높은 곳을 피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거만함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모든 거룩한 은총의 선물들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구원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또 자신의 외적 열성을 한껏 자랑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사람들에게 칭송을 얻고자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특별한 죄를 짓는 이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는 악의 속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오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은 스스로 거룩하다는 이들을 단죄하시고 반대로 어둠의 구렁에 빠져 있는 이들을 곧잘 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아닌 것을 죄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고 죄를 짓고 있는 이들을 세속적 칭송으로 꾸며주곤 합니다. 악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아무리 짐짓 거룩해 보인다 한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이들은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대제사장들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내면 속에 탐욕과 악의가 가득했지만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외적인 탈의 힘을 빌어 스스로 거룩한 사람인 양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그들에게 용서를 선물하고 그들의 뉘우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거룩함으로 이끌어 가는 일련의 일들 속에서 그들이 사실은 선을 추구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아내던 여인은 아주 훌륭한 표본입니다. 그들은 선을 추구하던 이들이었고 결국 그 선을 선물받게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거만한 이들과 악을 저지르는 이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 즉 그들의 악의 근원이 되는 존재인 사탄도 함께 처단될 것이고 가지, 즉 그들에게서 뻗어나가는 악의 소산들도 모두 처분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

그들의 생각

  다음은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생각의 단편입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당연히 바로 끌어내야지요. 그건 나의 이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니까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화해의 제물로 소나 한마리 잡아다가 하느님 앞에 바치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일 것 아니오. 하지만 당신은 저 환자를 형제라고 할 지 몰라도 나에게 저 환자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고 또 당신 예수라는 작자는 지금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밉보이고 있소.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은 우리의 양심을 찌른단 말이오. 그러니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이요. 그뿐만이 아니라오. 가능한 기회만 있으면 당신의 약점을 파고들어 당신을 로마에 고발해서 로마의 권력으로 당신을 망가뜨리고 파괴시키고 싶소.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오. 우리는 당신이 전하는 하느님 따위에는 관심없소. 우리는 당신 양이 아니니까. 우리는 우리가 만든 하느님이 좋소. 부자에게 축복을 주고 가진 부를 더욱 늘려주는 하느님이 좋단 말이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즐기는 사제들을 좋아하오. 우리가 주는 돈을 받으면서 싱글벙글하고 우리의 귀에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축복의 말을 던져주는 사제가 좋단 말이오. 당신이 하는 것처럼 아무것에도 기댈 곳 없는 고아와 과부, 불치병 환자를 돌보는 하느님 따위는 우리는 필요없소.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사실 돈이 하느님이오. 그래서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 생기면 그 즉시 반응하고 신경을 쓰지만 당신이 전하는 하느님이 원하고 바라는 것 따위는 크게 관심 없소. 그러니 그만 그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회당에서 사람들 앞에 우리에게 모욕이 되는 말은 하루빨리 집어 치우시오.'

영혼의 나병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아주 당연히 원래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선물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지닌 것,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도 사실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없는 것, 내가 욕구하는 것을 채우지 못해서 항상 불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그런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것을 통해서 항상 감사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당연한 것인양 여기고 거기서 더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는 신앙생활을 하느님에게 내어놓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라도 되는 양 간주하고 하느님에게 이것저것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욕구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도리어 하느님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로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 즉 구원을, 다른 말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해 주시려고 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현세적인 안락과 안녕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영혼의 나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다가갔던 나병환자들은 모두 육체의 나병을 지녔었지만 모두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던 영혼의 나병, 즉 캐캐묵은 인간의 교만은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해방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낫자마자 예전의 것들을 탐닉하러 돌아갔을 것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격의 순간에 하느님을 떠올리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람의 내면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서 예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십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구원을 얻기는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저 그분을 '안다'고 하면 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분을 알까요?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다채로운 차원을 다룹니다. 우리는 숫자를 알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알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아는 것이지만 그 안다는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숫자를 아는 것, 정보를 아는 것, 새로운 소식을 듣고 아는 것은 모두 피상적인 앎입니다. 그것은 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기억이 필요할 뿐입니다. 듣고 외워두면 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에 우리는 그를 피상적으로만 안다는 의미로 쓰면 안 됩니다. 사람에 대한 앎은 친교가 필수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에 그냥 유명 연예인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 사람이 기억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그 사람을 올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구원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압니까? 정보로는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분과 친합니까? 우리는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저를 4년 동안이나 지켜봐 왔으니 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모릅니다. 제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복음의 열정을 나눌 사람을 골라야 할 때에 누구를 고를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니, 애시당초 그런 열정을 나눌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막걸리를 같이 한 잔 마시고 싶다면 누구를 부를지, 이 동네에 유력 인사를 소개받으려면 누구를 찾아갈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것을 진정으로 함께 나눌 영적 친구를 찾으라면 누구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분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의도하고 어떤 길을 걷고자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고 그 길을 ...

교만

나아만은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그 교만을 낮추고 예언자의 명을 따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세례의 표상이기도 하고 현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칠성사의 의미이기도 하며, 교회라는 하느님의 말씀의 생명이 흐르는 강에 몸을 담그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즉시 그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올바로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씻기면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주인이 오직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기성 신자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하느님과 마몬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끗해지지 못하며 늘 걸었던 걸음을 다시 되돌아오고 또 걸어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셈입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느끼는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기성 신자들은 기껏해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인원 수나 늘려서 자신의 생활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 구상이나 하는 가운데 참으로 변화된 이들은 참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영적 결실을 늘려 나갑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애초에 나아만은 그 자신의 내면의 '교만'이 가장 큰 문제였고 나아만이 주는 선물을 받을 경우, 마치 나아만은 스스로 자신의 치유를 '구입'했다고 느낄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일부러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열왕기의 구절에서 엘리사의 종 게하지는 욕심이 났고 그에게 가서 선물을 받아옵니다. 그러자 지금껏 나아만이 지고 있던 그 병이 게하지에게 옮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