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은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그 교만을 낮추고 예언자의 명을 따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세례의 표상이기도 하고 현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칠성사의 의미이기도 하며, 교회라는 하느님의 말씀의 생명이 흐르는 강에 몸을 담그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즉시 그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올바로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씻기면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주인이 오직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기성 신자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하느님과 마몬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끗해지지 못하며 늘 걸었던 걸음을 다시 되돌아오고 또 걸어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셈입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느끼는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기성 신자들은 기껏해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인원 수나 늘려서 자신의 생활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 구상이나 하는 가운데 참으로 변화된 이들은 참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영적 결실을 늘려 나갑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애초에 나아만은 그 자신의 내면의 '교만'이 가장 큰 문제였고 나아만이 주는 선물을 받을 경우, 마치 나아만은 스스로 자신의 치유를 '구입'했다고 느낄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일부러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열왕기의 구절에서 엘리사의 종 게하지는 욕심이 났고 그에게 가서 선물을 받아옵니다. 그러자 지금껏 나아만이 지고 있던 그 병이 게하지에게 옮아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은총을 갈구하고 그것을 받을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우리의 금전적 대가가 그것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은총은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보여야 하는 유일한 자세는 바로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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