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위신이 중요하고 돌고 도는 돈이 중요한 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헌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추석이라는 기간 동안 한 부부가 싸우고 다시 화해했다고 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자녀들의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이런 일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유산 문제로 형제들이 모여 한바탕 굿을 벌이고 결국 다들 사는 집으로 돌아가면 이제는 잠잠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돌아가는 걸 자녀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예언자는 어떨까요? 정신나간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선이라는 가치,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치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정반대로 더러운 영의 활동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더러운 영의 활동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더러운 영은 거룩함을 앞에 두고 버티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뒤에 그 텅 빈 영혼의 공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신경써야 합니다. 더러운 영을 치우기만 하고 그곳을 텅 빈 공간으로 만들어 놓으면 전에 있던 더러운 영이 다시 돌아오고 거기에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얼마 전에 신자가 아닌 분이 헛것을 본다고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비슷한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그걸 알아들을까요? 그들은 당장의 지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불편만을 없애기를 원하지 거기에 새로운 주인을 모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제가 자기 집까지 찾아가주고 축복을 기원해 주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멈춰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결국 그들의 끝은 이전보다 더 비참해 집니다.
사람들은 죽고 나서야 영적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더 지독한 것은 그것을 메꿀 충분한 기회가 있었고 그것을 모두 허송세월했다는 것을 뒤늦게 바라보고 한탄에 빠질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지나가면서 우리가 한 모든 결정들이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죽음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이들에게 오늘 하루는 여전히 세속적 야욕을 위한 투쟁의 장이고 서로의 다툼을 늘려 나가는 기회이며 세상 것들을 얻기 위해서 기를 써야 하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런 이들 앞에 요엘 예언자는 또다시 외칩니다.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이 들이닥치듯 다가온다.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고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땅의 모든 주민이 떨게 하여라.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
정녕 그날이 가까웠다.
우리가 이 경고를 영적으로 들을 귀만 있었더라도 우리의 영혼의 두 손이 공허하게 텅 비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인을 없애셨으며, 그 이름을 영영 지워 버리셨나이다. 민족들은 자기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네가 쳐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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