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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의로움, 그리고 회개의 기회(중요!)



먼저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율법의 준수 여부는 사실 죄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미사를 참례하면 좋은 행동, 그리고 술집에 가면 나쁜 행동으로 분별을 합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미사에 오기 싫은 것을 사람들의 위신과 평판 때문에 겨우겨우 나온다면 그가 참례하는 미사는 본질이 사라져버린 외적인 껍데기를 위한 위선적인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의 옛 친구들을 복음화하기 위한 열정으로 친구들이 모인 장소를 찾아 술집을 간다면 그를 두고 단순히 술집을 방문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은 단순히 그 외적 표지의 가치로만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본질적 의도와 가치가 중요한 셈입니다.

죄와 의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 해가 있고 아래에 구덩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인간은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셈입니다. 눈을 들어 해를 바라볼 수도 있고, 아래로 구덩이 속을 바라볼 수도 있겠지요. 인간은 이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위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갈망할 수도, 또는 아래로 구덩이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 든 것을 갈망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가 서 있는 위치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핵심은 그가 어디를 바라보고 갈망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죄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이런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의지적으로 무시하고 아래 구덩이를 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의 서 있는 위치는 중요하지 않지요.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또는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디를 바라다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됩니다. 우리가 위로 빛을 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아래로 어둠의 세계를 갈망하고 있는 중인지가 바로 우리의 죄와 의화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것, ‘돌이킴’이라는 것은 바로 아래로 구덩이를 바라보던 우리가 눈을 들어 위로 하늘의 빛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의외로 ‘회개’라는 것은 참으로 쉬워 보입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이라도 하느님을 향해서 우리가 의지적인 선택을 하면 그것으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자연 ‘용서’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우리가 사다리를 딛고 가장 높이 올라가서 얻는 무엇, 즉 간절히 노력해서 얻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꺼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돌이킴’, 즉 ‘회개’ 뿐이었지요.

그럼 이렇게 쉬운 회개를 사람들은 왜 좀처럼 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 궁금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핵심은 돌이킴이라기보다는 그 돌이킴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은 아주 작은 계기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회개의 상태’가 유지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둠의 영은 다시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다시 어둠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이에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회개의 상태를 내던져 버리고 다시 어둠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고 그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다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혹은 반대로 비참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더욱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게 되지요.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언제나 온유하고, 조화롭고, 인내롭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서 그것으로 자신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의 주변에는 늘 그런 결과물들이 넘쳐 흐르는 것이지요. 그는 그의 거룩한 삶으로 온갖 좋은 열매들을 내놓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그를 더욱 더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반대로 어둠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어둠에서 썩은 것들을 얻게 됩니다. 그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들어 그들이 자신을 기피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고 들어가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 앞에 활짝 열려 있는 선택의 가능성 가운데 우리는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주변을 서서히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이 계속되다 보면 마치 늘 새롭게 기름칠을 해서 잘 준비된 엔진이 좀처럼 고장이 나지 않는 것처럼, 또 반대로 전혀 쓰지 않아서 뻑뻑하게 된 엔진을 다시 작동하기 힘든 것처럼 하나의 흐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의 관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은 좀처럼 어둠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되고, 반대로 어둠을 향해서 계속 나아온 사람은 다시 빛으로 돌아가기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회개’의 가능성이 점점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지요.

회개라는 것은 일종의 기회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24시간을 살아가면서 늘 하느님을 마주할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 가까이 머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평소에 성경도 읽고, 평일 미사도 나가고 하면서 더욱 하느님을 마주하고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되는가 하면, 반대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은 그나마 느슨한 실처럼 연결되어 있던 주일미사 마저도 나중에는 내동댕이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회개를 유지하기도 힘들지만, 나중에 회개의 기회마저 상실하게 되면 그 영혼에게 남는 것은 어두움 뿐입니다. 그는 그마저 간간이 다가오는 회개의 기회 마저도 사정없이 내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실 적지 않은 이가 병상에서 자신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아무런 영적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비명에 가곤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일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회개의 기회를 잡아내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그 회개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방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그 바라봄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샌가 다시 유혹에 넘어가 그 회개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서 이 소중한 기회들을 밀쳐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좋은 기회’들을 밀쳐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만큼 퇴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해 있지 않은 그 수많은 시간동안 우리는 단순히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뒤로 또 뒤로 점점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회개의 기회가 다가왔을 때에 그 기회를 붙들기보다는 늘 하던 대로 또다시 밀쳐 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나락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뉘우치는 자에게 용서를 선물하십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은 아무에게나 마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은총은 우리의 회개를 통해서 다가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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