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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을 곡해하지 않기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이 시작되면 온갖 ‘운동’들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일단 가장 먼저는 사순저금통이 배급되지요. 그렇게 우리는 잔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순을 맞아서 ‘희생’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희생은 ‘담배 끊기’, ‘술 절제하기’ 등입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러한 일들(가난한 이들 돕기, 자신의 건강 보살피기, 절제를 훈련하기 등등)은 사순이 아니라 평소에도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물론 사순이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수는 있지만 사순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은 아닌 셈입니다.

사순의 본질적인 의미는 회개와 성찰, 반성, 참회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무언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 돕기가 다른 이들 앞에서 드러내듯이 보이는 허영이 될 수도 있고, 건강을 보살피겠다는 것이 육신에 대한 집착의 어긋난 방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은 바로 그런 내적인 엇나감을 바로 세우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한 대표적인 사순의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이 오심을 준비하는 기간을 ‘길을 닦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길을 닦는 것은 낮추어진 것을 높이고 높아진 것을 낮추는 일입니다.

낮추어진 마음은 죄스런 마음들, 하느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고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그만두고 다시 내면을 희망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니 우리의 그릇됨을 깨끗이 하시고 다시 본래의 궤도로 올려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반대로 높아진 마음은 교만하고 허영심에 가득한 마음, 세상에 물든 마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고 누리려 하면서 마음을 들어 높입니다. 사순은 그런 들어높여진 마음을 다시 정상궤도로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에게는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형제 자매라는 것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지요.

바로 거기에서 모든 일이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나에게 쓰고 남는 찌꺼기를 내민다고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형제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돕고자 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뉘우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지극히 깊은 사랑을 올바로 깨달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순’은 가장 ‘사랑’하는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랑을 이 세상 안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사랑에 반대되는 움직임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힘겹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치롭게 얻어내는 사랑이고 우리를 키워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사순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사랑하기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담배는 끊어 보려고 시도 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증오와 원한은 끊어보려고 시도하기 힘든 것입니다. 사순을 맞아서 하루 날 잡아서 단식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지만 내 마음 속에 세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끊고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은 셈이지요.

사순이 다가왔습니다.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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