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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시련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슬픈 일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에서 느끼셨던 것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구하러 왔고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푸시러 왔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둠에 사로잡혀 그분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들었으니까요. 그냥 하시는 일을 하게 내버려만 두었더라도 괜찮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악령에 들렸다 하고 죄인으로 매도하고 기존의 사회기반을 무너뜨리는 악한 존재로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여 버렸지요.

비록 같은 십자가의 수난은 아니지만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운명을 타고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에 가담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박해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둠이 가득한 곳에 빛을 놓아두면 어둠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과는 달리 영적인 빛은 어둠을 괴롭게 만들고 어둠이 반항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빛을 끄려는 시도를 하지요. 온갖 회유와 유혹과 저항으로 빛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됩니다. 그들의 선한 마음은 다른 선한 이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악으로 인해서 야기된 고통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악으로 인해서 야기된 고통은 그가 악을 그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동정’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이 다시 하느님의 품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온유와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지요.

이는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내용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상대를 대하려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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