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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파견을 받은 자가 해야 할 사명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지붕을 뚫고 들어간 중풍병자의 일을 떠올려봅시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멀쩡히 두고 그의 죄를 먼저 용서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혼이었습니다. 영혼이 썩어 있는데 몸이 멀쩡히 살아난 들 다시금 죄스런 쾌락의 생활로 빠져드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며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는 일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영혼이 앓는 이들, 영혼이 죽어버린 이들이 있으며, 영혼에 나병이 걸려 있는 이들과 마귀들이 들러붙어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육신에 질병이 있듯이 영혼에도 질병이 존재합니다. 육신이 병에 걸리면 활기를 잃어 나약해지고 저항할 힘을 상실하며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질병이 걸리면 영혼이 생기를 잃고 소극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영혼이 시름시름 앓게 되고 사랑에 있어서 소극적으로 변하며 응석꾸러기로 변하게 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그야말로 모든 활동이 정지하고 주변 사람들이 시신을 염하고 땅에 묻어도 아무런 반응을 않는 것처럼 영혼도 아예 죽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죄는 영혼을 질식시키고 거의 죽은 상태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사랑’에 있어서 ‘선행’에 있어서 그야말로 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병 환자들은 전염성이 있는 병 때문에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나병이 깃들게 되면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것이 남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남들이 자신을 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은 아무리 친구들 사이에 왁자지껄 어울리고 떠들며 논다 하더라도 결국은 진정한 의미로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때로는 마귀들이 영혼에 들러 붙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은 함부로 우리의 영혼을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많은 유혹의 미끼를 던져 놓고 마치 낚시를 하듯이 기다립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그 미끼를 물어 어둠에 빠져들고 최종적으로 어둠의 영마저도 끌어 당기는 셈이지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마귀들이 우리 내면에 머무르면서 우리를 조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상태의 영혼들을 구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파견 받은 자는 이미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 사제들은 고해성사 안에서 이 능력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각심을 지녀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이미 가까이 다가왔고 추수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저 받았으니 이 모든 은총의 직분을 거저 내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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