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화목하게, 혹은 화목한 듯이 지내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한 점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굳이 상대의 아물어가는 상처를 헤집어 괴롭힐 이유는 없기에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알면서도 딱히 반응하지 않고 서로의 선을 존중하며 지냅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직무상의 관계에서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직장이라는 곳은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를 다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사의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필요에 따라 협업하기도 하면서 일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이 쉽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가야 하는 길이 뚜렷하고 그 목적에 상반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악을 견제하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실천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는 거라면 우리는 서로 좋은 얼굴을 하고 지내면 그만입니다. 상대가 선하건 말건 상관이 없습니다. 공동의 이익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그에 반대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칩니다.
그것이 오늘 스테파노의 순교 기념일이 시사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왜 죽어야 했을까요? 그들이 선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착한 표양을 보인다면 그들은 도대체 왜 순교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선의 실천이 악인들에게는 곧 그들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과일 가게에 가서 귤을 먹든 참외를 먹든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 원하는 과일을 가지고 있는 돈만큼 사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문제는 다릅니다. 선이 머무는 곳에는 악이 설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선한 이들,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이들은 세속을 뒤쫓아가는 이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악인들은 의인의 존재만으로도 거부감을 느끼고 그들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신들의 어둠에 대한 고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이를 잘 드러내 줍니다.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적극적인 신앙의 노력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그저 사람들에게 평이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거짓 예언자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고 있는 이를 가만히 두면 둘 사이의 관계는 좋아질지 몰라도 훗날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으로부터 ‘왜 너는 그를 초대하지 않았느냐?’ 하고 질타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참된 신앙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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