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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정해져 있는 운명이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있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가 선택을 하듯이 하느님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대부분의 경우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만일 진정 원한다면 '끝까지'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개개인의 운명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방울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고 나면 하늘로 솟아 오르지는 않듯이,
일단 시작된 움직임은 주변의 정황을 따라서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측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운명은 이미 어느정도는 정해진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의 유혹이 있는 곳이면 걸려들게 마련입니다.
인기를 얻으려는 사람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민감하게 마련입니다.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기보다 더 큰 권력가에게 굽신거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기적'과 같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순간입니다.
성경은 이 순간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꾸어 세상에서 마음을 놓고 하느님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순간,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던 모든 운명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일단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고 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쓰시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멀쩡하게 일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신학교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정말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평화를 되찾기도 하고,
누군가는 가진 돈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살짝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로 보이겠지만,
그들은 늘 확신과 기쁨에 차 있고 두려움이 없으며 평화 중에 머뭅니다.

우리의 운명은 어느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회개'를 통해서 언제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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