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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것

어제 저녁미사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원하는 걸 찾게끔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얼 원하세요?"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우리는 뭔가를 얻어만나기 위해서 그걸 적어도 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구하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돈을 찾을 것이고,
하느님을 얻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오늘 이 시간에 문득 나를 되돌아보면서
"과연 난 무얼 원하는가?"를 곱씹어보고 있는 중이다.
과연 난 뭘 원하고 있을까?

딱히 바라는 게 없는 느낌이다.
세상 적으로야 몇 가지 내가 '갖고' 싶은 게 있지만
그건 내 호기심과 욕심과 필요에 의해서 그런 것이고
정작 내 가슴 깊이 내가 바라고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중이다.

도대체 그건 뭘까?

최근들어 농담처럼 '내가 바라는 건 우리 사제단의 성화와
본당 가족들의 성화 나아가 신자들의 성화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돌아다닌다.
그래, 그걸 원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보다 깊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다.
그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하느님께서 이 자리를 떠서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최상의 목표는 앞서 말한
내 주변 모든 이들의 성화이겠지만,
행여 더 많은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가야 한다면
필요한 능력을 쌓는 것이 나의 새로운 목표가 될 것이요,
청소년들 사이에 던져진다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내 새로운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런 목표들 보다 더 근본에 결국 내가 바라는 건,
하느님께서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그게 뭐든 나를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한 발짝을 달리 나갈 수 있는 무언가를 청할 수 없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거기 다 들어있다.
다만 두 케이스다.
여전히 '일용할 양식'이나 '형제와의 용서', '유혹', '악에서의 구원' 같은 아래쪽에 머물러 있는 부류가 되든가,
아니면 보다 윗쪽의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려는 노력', '당신의 나라를 이루려는 노력', '당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는 노력'에 헌신하는가 하는 큰 두 줄기이다.

여전히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 머물러 있는 많은 이들이 있다.
어여어여 정리하고 전반부의 청원으로 우리의 마음을 들어높여야 할 것이다.

울타리 부근에서 서성이며 어떻게하면 나가볼까를 걱정하는 양이 아니라,
울타리 안에서 목자와 기뻐 뛰노는 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바램의 수준을 한껏 들어높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부름받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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