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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과부 할머니

"신부님요, 제가 혼자 사는 과분데요. 집터가 있고 집이 있기는 한데... 화장실이 없거든요. 우째 좀 도와주실 수 없을랑교?"

어제 찾아온 한 할머니의 부탁이었다. 그 길로 그 할머니를 모시고 가정 방문을 갔다. 할머니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아니나다를까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외곽지의 길도 포장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집에 도착했다. Cuatro de Abril(4월 4일)이라는 지역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개가 으르렁댄다. '우쭈쭈...'하면서 내 나름의 평화의 메세지를 보내고 안으로 들어서니 집 모양새가 나온다. 벽돌로 된 단칸방 하나에 나머지는 나무로 지은 집들이다. 그리고 안쪽 구석에 검은 비닐로 둘러놓은 재래식 화장실이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 짓는데 얼마 한다 카니껴?"
"500 Bs.(한화로 8만원 정도) 든답니더. 땅에 구멍 파는 값은 따로라 카데예."(편의상 대구 사투리를... ㅎ)
"400Bs. 드릴 테니까 바로 시작하시이소. 그리고 여기 반장 없지예? 사람들 모아가 반모임 만드시소. 이래 따로 맨날 다들 찾아와가꼬는 내가 일을 모하지예. 앞으로는 반장 통해가꼬 일을 할랑께 그래 아시이소."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단다. 집을 나서는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나중에 찾아가보고 일 시작했나 확인해야지. 그냥 생활하고 밥 사먹는데 써버렸으면... 뭐 그래도 어쩔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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