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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과 목자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0)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말일까요?

훔치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있어야 합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몫이고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언제나 다가와서 하느님의 몫을 훔쳐내려고 합니다. 훔치는 행위는 언제나 몰래 이루어집니다. 누가 대놓고 보란 듯이 훔쳐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근슬쩍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지요. 보란 듯이 드러나는 악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은근슬쩍 이루어지는 은밀하고 내밀한 악입니다.

죽인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양들은 생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하느님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그 양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생명을 없애려고 합니다. 죽어있는 것을 다시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받고 태어났고 우리의 순수와 맑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의 영들은 언제나 그러한 것들이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생명력을 잃고 죽음의 상태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멸망시킨다는 것은 굳건히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력을 잃고 파멸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지요. 철저히 생명과 정반대의 성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둑의 역할이지요. 그러나 도둑은 이 모든 과정을 몰락하는 본인이 알지 못하게 합니다. 

이미 살아있는 양들이 무슨 생명이 또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생명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행복감을 느낄 때에 내면으로 느끼는 그 생기가 바로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물론 이 생기를 전혀 다른 육체적 쾌락과 혼동하는 이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를 때에, 그분의 진리, 사랑, 정의, 성실에 함께 할 때에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입니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우리의 주님은 살리는 분, 생명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남은 것은 우리의 결정이지요. 과연 누구를 우리 안에 불러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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