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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인간과 영원의 씨앗


코헬렛의 저자는 ‘허무’를 노래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순환할 뿐이지요.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고 해도 영원 안에서 흘러가는 우주 속에서는 지극히 작은 발버둥일 뿐입니다. 먼지 보다도 못한 셈이지요.

헌데 왜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목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허무하기만 한 존재라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토록 신경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우리 안에 소중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자신도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중한 것이 그 내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에 맞닿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가능성’을 품고 있지요. 이는 마치 씨앗과도 같습니다. 씨앗은 싹이 터서 자라나고 마침내 커다란 성체가 되기 전까지는 씨앗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씨앗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지요. 바로 우리 영혼은 하나의 씨앗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 존재의 허무를 노래하면서 그 이면에 우리의 마음을 들어 높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찰나에 지나가버리는 우리의 삶이 들어높여져 영원에 가 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허무함을 느끼고 마음을 들어높여서 영원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허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합니다. 무엇을 실제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허무 안에서 모두가 빠져드는 게임에 똑같이 빠져듭니다. 더 많이 갖고 벌고 오르고 또 그 이면에 잃고 빼앗기고 떨어지고 하는 게임을 하는 것이지요. 아예 그러한 것들을 초월해서 마음을 들어높이면 진정으로 평온함이 나의 내면을 지배할 것인데 우리는 조급하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지진이 일어나고서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지요. 또 누군가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누군가는 지금 누리는 삶이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을 드높은 차원으로 들어높이는 행위입니다. 지금의 생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또 영원 안에서의 삶을 기다리는 사람이지요.

우리의 삶은 분명 허무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전혀 허무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 가능성의 씨앗에 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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