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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드러내는 말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 4,12-13)

다이아몬드는 그 가장 강력한 경도로 인해서 세상에 자르지 못할 물건이 없게 됩니다. 약한 것은 보다 강한 것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법이지요.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가장 맑고 투명한 진리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거짓과 속임수는 우리의 본질을 덮어 씌우지요.

아주 간단한 예로 누군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 앞에 ‘사랑해야 한다’, 또는 ‘용서하라’는 하느님의 거룩한 명령은 그의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기 싫고 용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갖가지 합당해 보이는 변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하지요. 하지만 침묵 속에 잠겨들면 결국 우리의 숨은 속내가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쇼핑에 매달리거나 술에 취하거나 외적인 활동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내면을 파고드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분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감추고 있던 것이 드러나고야 말겠지요. 그것이 빛인 사람은 영광을 입을 것이고, 반대로 그것이 어둠이었던 사람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를 속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독을 통해서 나 자신도 속일 수 있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그분의 진리의 잣대 앞에 나서게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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