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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단련과 다가오는 큰 은혜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지혜 3,5)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련하는 사람은 그 단련의 결과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단련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헌데 무엇을 단련할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위해서 시간을 쏟습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돈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합당한 곳에 투자를 해서 돈을 더 벌까 온갖 궁리를 할 것이고 그렇게 할 수록 그들의 능력을 개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또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그대로의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겠지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것을 훈련하고 단련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법’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중요하게 되는 주제이지요. 다른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무색해지는 반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신앙인들 안에서 납득되는 논리일 뿐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리석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잘 놀고, 좀 더 많이 벌고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으니 그와 반대되는 일, 오히려 그에 방해가 되는 일은 어리석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의 단련은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느님을 배워 알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에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어리석다고 할 것이며 그와 반대되는 유혹을 끊임없이 내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단련에는 어마어마한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상급이지요. 이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특정한 행위로 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그런 희망을 품고 있는 우리도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세속에 빠져 사는 이에게 신앙은 어리석은 것이고 다가서기도 싫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 안에서 오가는 수많은 가르침과 말씀은 자신의 양심을 꾸준히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과 이해 관계가 맞거나 자신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일들을 찾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그들의 흐름에 동조되지 말고 꾸준히 단련에 힘을 쏟고 다가올 은혜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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