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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한계



현대의 심리학은 인간의 내적 영역을 단순히 ‘학문’으로 변화시키고 모든 것이 상대적인 듯이 대합니다.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부딪히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합니다. 즉, 선과 악의 차이가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를 뿐이고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며 그 안에는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이 심리학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의 오류입니다. 이들은 흔히 서로의 성격 유형을 구분하고 그 차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걸 바탕으로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물론 그 모든 학문적 영역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영역을 거기에 내던져버려도 안됩니다.

인간에게는 분명한 선과 악의 추구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것이 악한 행동인 줄을 본인은 압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자행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 행동이 수치인 것을 알기에 그에 대한 수없는 변명을 하곤 합니다. 반면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그 일을 하는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악은 교묘하고 영리하고 기민합니다. 마치 양파처럼 몇 겹이나 자신을 둘러싸고 안에 들어있는 시커먼 욕구를 감추려고 하지요. 반면 선은 명료하고 뚜렷하고 천상의 지혜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숨길 것이 없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언뜻 남을 도우려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뜻 성경을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학적 교만을 채우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 생활에 충실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다른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기초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어둠의 활동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선과 악의 방향은 뚜렷이 존재하고 사람은 저마다 그 결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선택해야 하고 악을 피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세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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