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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숨어 있는 가라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 소통의 여지가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무언가 그릇되었다는 것이 점검 되었을 때에 또는 다른 이로부터 정당한 충고를 듣게 되었을 때에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소통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상인의 범주를 심각하게 넘어서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장애를 지닌 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증세가 드러날 것이고 그에 해당하는 합당한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면 됩니다.

문제는 영적으로 심각한 어긋남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겉으로는 숨기고 사는 이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사실 영적인 어긋남, 즉 악한 의도는 외적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를 숨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어둠이 드러나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게 됩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지독히도 거룩한 모습을 꾸미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고 더욱 '거룩한 외적 행위'를 습득하려고 애를 쓰고 그런 노력의 결과로 교회 안에서 꽤나 높은 지위들을 꿰차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장'으로 있는 교회는 전혀 소통이 되지 않고 성령의 활동이 활발해지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장'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지 않고 그에 따라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곧잘 악습에 젖어듭니다. 술을 마시고 놀러 다닐 궁리만 합니다. 교회의 재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려고 하고 자신의 인기를 드높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정말 양들에게 거룩한 양식을 먹이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 사명과는 상관 없이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언제나 함께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운명을 뚜렷합니다. 그 가라지와 같은 이들은 진정으로 겁을 상실한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다가올 분명한 결과에 대해서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도모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머무르는 자리에서 성실히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말고 악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부족함으로 비난한 근거를 찾을 수 없도록 일상을 더욱 성실하고 거룩하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쉽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노력입니다.

댓글

정경분님의 메시지…
내가 가라지는 아닌가?
살펴 봅니다.
때로는 가라지 인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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