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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하는 자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1코린 4,8)

가난한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까탈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을 채우고 또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면 더할수록 더욱 기뻐합니다.

반면 부자는 굉장히 까탈스럽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이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늘 편안하고 안락하고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살아온지라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 영역이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일로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물질적 부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면의 부자됨'에 달려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미 '배가 불렀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더 맛깔스러운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가르침에서도 비슷하니 배가 부르면 더이상 본질의 가르침이 와 닿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1코린 4,5)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일은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현재의 직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매진해야 하고 훗날 하느님 앞에서 그 사명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는가 하는 것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여러분에게 곧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쭐거리는 이들의 말이 아니라 힘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원합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매를 들고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까? (1코린 4,19-21)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데에 바빴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의 빛이 가 닿게 하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빛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 근처에는 언제나 제 할 일은 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그릇된 의견을 퍼뜨려 복음의 빛을 흐리려는 시도가 관촬되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하십시오. 우리가 이 편지에 적어 보내는 말에 누가 순종하지 않거든, 그를 주목하여 그와 상종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여 그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2테살 3,11-14)

댓글

익명님의 메시지…
부산에서 왔다갑니다. 깨어있는 말씀을 잘 듣고 있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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