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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단상



달리기를 하면서 부쩍 안정되어가는 제 육체를 느낍니다. 항상 뭔가 찌뿌둥하고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면서도 어딘가 아파오던 육체가 다시 탄탄하게 잡혀가고 생기를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은 더 훈련이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 아침에 운동을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에는 피로감이 몰려 와서 다른 일을 손에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500미터를 달리는 것만 해도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그 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제 2키로 정도는 꾸준히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 이상을 넘어 달려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무리가 가는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번 한 주가 다르고 또 다음 한 주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달리기에는 호흡이 중요합니다. 그냥 생각없이 숨을 쉬고 있다가는 어느 새 헐떡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호흡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천천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면서 내가 하는 호흡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지만 딱히 숨을 특별히 따로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쉬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산소가 부족하면 들이키는 것이고 들이켰으면 자동으로 내뱉을 뿐입니다. 그러나 달리기를 하면 그 호흡이 느껴지게 되고 호흡을 가로막는 아주 작은 계기라도 전체의 몸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운동하는 시간을 아침으로 선택한 것은 그 시간이 가장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는 점심을 먹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식사 후의 몸의 무게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서 마냥 걷게 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아침이 좋은 이유는 그 특유의 시원함 때문입니다. 날씨가 점점 더 더워져가면서 그나마 덜 더운 아침 시간이 운동하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시간을 더 즐기게 됩니다.

뛰는 동안은 항상 의지와의 싸움입니다. 언제라도 멈춰 버리고 싶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몸이라는 녀석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아서 언제나 더 편하고 쉬운 것으로 저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반면 그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언제나 저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몸은 만만치 않게 저항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싸움이 이루어집니다.

무리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운동에 열중하려다가 필요 이상의 피로도를 얻어서 다음날 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도 합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뛰는 걸 멈추고 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운동할 날은 이날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요.

사실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한계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운동에서는 일시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보다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걸음마 단계지만 일단 시작된 일이고 꾸준히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댓글

Unknown님의 메시지…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씀... 기쁜 소식이네요.^^ 신부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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