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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순진한 신앙의 아름다움




잠자리를 보고는 그 나는 모습에 경탄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우리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그 아이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 있지요. 그래서 더는 경탄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곤충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과학자'는 잠자리를 한마리 잡아서 온통 뜯어놓고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박제를 해서 자신의 연구를 완료했다고 우쭐대겠지만 정작 아이가 바라보던 그 생명력 가득한 잠자리를 상실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고 그 신비는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고 참여하는 만큼 드러나고 밝혀지기도 합니다. 물론 절대로 그 깊은 신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어린 아이의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에서 경탄하게 되는 신비의 아름다움도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닙니다. 그리고 특정한 경우에는 그 신비를 열심히 연구해서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도 순진한 아이의 시선에서 더 진리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탄하기를 그쳐버린 신앙, 이미 성당 문턱을 닳도록 다녔다고 해서 더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스스로 교만에 빠져버리는 상태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미온적 태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의 이기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신앙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의 각종 제도와 구체적인 인물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원래 보물의 빛 자체를 상실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보석은 여전히 보석이라서 먼지만 좀 털어내고 나면 다시 예전의 그 찬란함을 빛내게 마련입니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하고 순진한 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당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던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 속에는 여전히 우리가 찾아내고 얻어내야 하는 무수한 가치들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저마다의 영리함으로 시끄럽게 떠들 때에 홀로 성당에 조금 더 일찍 나와서 성체 앞에 머무르는 신앙을 회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댓글

Unknown님의 메시지…
신부님의 명료한 말씀 속에 큰 울림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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