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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다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대'라는 개념입니다. 우리와 피조물은 같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협력자'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같은 인간에게서 인간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통해 사람을 서로 동등한 존재로 만들어 내십니다. 두 존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보완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창세기는 '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죄는 '파괴'를 의미합니다. 원래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다른 인간과 피조물과 하나로 맺어져 있는데 죄는 그 관계들을 하나씩 둘씩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나아가 인간들 사이에도 서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에 와서 부정할 수 없도록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의 주제는 '관계의 회복'에 중점을 둡니다. 피조물과의 관계 회복,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그리고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이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녀들로써 기쁨을 얻으리라 희망하지 말고 영원 안에서 만날 자녀들, 영적 자녀들을 얻음으로써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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