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라는 것은 선을 긋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선과 무관합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국경 안에 들어선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이 있지만, 단순히 그것이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데도 안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이 나라 사람인데도 밖에 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히려 끌림과 거부에 가깝습니다. 참새가 향긋한 곡식에 끌리고, 무서운 동물에게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참된 믿음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에게 끌림을 느끼고 하느님 아닌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몸과 영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몸이 끌리는 것은 영이 거부하는 것이고 영이 끌리는 것은 몸이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지키려고 하는 이는 사실은 선 너머에 있는 것에 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끌리지만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는 않기에 그어 놓은 선에서 멈추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는 선 너머에 있는 것에 갈증을 느낍니다. 이를 말하는 것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복에 이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나에게 요구되는 ‘포기’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예수님을 악마가 있던 광야로 보낸 것처럼 때로 우리를 인도해서 시련을 겪게 하더라도 그것을 끌어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내면의 끌림을 왜곡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는 세속에 끌리는 자들이 신앙에 끌리는 자들을 만나면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비난해서 자신들이 마치 옳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처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가와서 성사의 은총으로 내면의 씻김을 받게 되지만 그 안에 참된 주인을 모시지 않으면 그의 내면은 전보다 더 더러운 탐욕과 이기심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짓지 않을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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