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꾸준하게 가르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살이의 멍에'를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해 오던 것을 하는 데에 안락함을 느낍니다. 거기에 어찌나 고착화 되어 있는지 새로운 것이 다가오면 그것이 아무리 본질에 더 가깝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거부부터 하고 봅니다.
율법에 고착화 된 상태, 하지만 갈라티아서가 말하듯이 그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다시 말해 특정한 행동습성을 통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분인데 그분을 죽은 것 가운데에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제가 말하는 것도 거의 이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를 올바로 이해하면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그 주변이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무르는 이 장소도,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도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애착한다고 해도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가 아무리 융성했다고 한들 지금에 와서 그들의 권위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나 잠깐 누렸던 것들일 뿐 지나고 나면 모두 먼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초전이라는 공동체는 참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 공동체에 예수님이 오더라도 아마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장이 되고 텃세가 생겨나게 됩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들의 속에 가득찬 것으로, 성경에 의하면 탐욕과 사악으로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사실 실제로 그 잔치는 벌어지고 있었고 지금은 잠시 멈춘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초대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하는 곳이면 어디나 머무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의 초대도 받으셨고 부유한 이들의 초대도 받으셨으며 겸손한 이들과 머무는 것을 즐기셨지만 교만한 이들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사이들의 기분이 어떠하였을까요? 그들은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라 반박하지는 못하고 아마 뒤에 가서 수근거리면서 그분이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생각하고 그분에게 어떻게 하면 해가 될 함정을 팔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수시로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들었고 결국 때가 되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양처럼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고귀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일이라도 사실은 의미 없는 일이 됩니다. 종이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한들 얻는 것이라고는 끼니나 겨우 때울 것들 뿐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상속자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맺고 있는 유대관계 덕분에 상속자가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복음 환호송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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