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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아버린 시대




사람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두려움을 통해서 그에 반발해서 신앙을 붙들게 하는 방법입니다. 흔히 사용되었던 '지옥'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그에 반해서 믿음을 붙들게 하는 방향과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통해서 사람을 이끄는 것입니다. 신앙의 보람과 기쁨,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매력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바람직하고 좋은가? 언뜻 후자가 더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정답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두 면을 적절히 내비쳐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두 가지는 필요합니다. 아무리 잘 사는 사람도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신의 구원을 두려운 마음으로 챙겨야 할 필요도 있고 또 지독한 죄악 속에 머무르는 사람도 때로는 참된 신앙의 매력에 이끌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올바른 식별력으로 시의적절하게 두 요소를 잘 사용하여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소위 현대적인 교회는 '두려움'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해 왔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겁을 주느냐고 하면서 교회가 큰 잘못이라도 한 듯이 말하고 가능하면 부드러운 말, 아름다운 말,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말로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는 것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훈육자는 언제나 좋은 것을 주려고 하지만 동시에 그릇된 행동을 수정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적절한 자극 없이는 오히려 사람들의 어둠의 성향이 쉽게 강화될 뿐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잘 가는 것인지에 대한 감각도 사라지는 법입니다.


사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있습니다. 경고라는 표지판이건, 광고라는 표지판이건 뭐든 보지 않겠다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면 둘 다 소용없는 법입니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모든 것에 눈을 감아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자극이 되지 않습니다. 애시당초 구원에 대한 감각이 없는데 멸망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구원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현세라는 것에 완전히 물들어버린 영혼은 마치 시각을 잃어버린 동물처럼 그 순간순간 다가오는 느낌을 뒤쫓아 가게 되고 결국 세상의 허황한 가르침을 신념 삼아 살아가게 됩니다.


처음부터 눈이 없이 태어났으면 그에게 탓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눈은 처음에는 열려 있었는데 우리가 서서히 감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뜰 수 있지만 다시 뜨기를 꾸준히 거부하는 중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그들이 다시 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뾰족한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꾸준히 눈 앞에 드러내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가르침을 펼치고 그들이 언제든지 눈을 뜰 때에 다시 볼 수 있도록 볼거리를 눈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의 있는 영혼은 언제나 일상에서 꾸준히 향기를 풍기고 다닙니다. 그러면 마음이 메말라 있던 영혼들이 그런 이들을 보고 잠시나마 그 향기에 매혹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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