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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대림3주 수요일

천사의 방문을 받은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즈카르야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동정 성모님이십니다.
천사의 방문을 받고, 두 사람 다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리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인사를 합니다.

본격적인 아기의 잉태와 삶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전달되고,
두 사람 모두 질문을 합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헌데 천사는 이 양자의 '유사한' 반응에 정 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즈카르야에게는 그의 '의심'을 질책하며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를 만들어 버리고
성모님에게는 다시금 친절히 그 일의 진행 과정을 설명해 주십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거의 유사한 두 일 속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의 이 질문에 더 이상 다른 무언가를 드러내어주진 않습니다.
다만 작은 힌트 하나가 즈카르야를 질책하는 천사의 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숨겨진 오직 한 가지의 차이는 바로 '신앙',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신앙은 절대 외적인 무언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말인즉슨, 우리의 세례, 견진 등등의 외적인 표지를 지닌 행위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미 가진 신앙을 그런 행위들로 확인하고 도움을 받을 지언정
그러한 행위가 우리의 신앙을 이루어주진 않는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점심을 먹는 두 사람에게 있어(외적 행위의 유사성)
그 내면에 한 사람은 하느님께 이 모든 음식에 감사를 드리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고 투덜거린다면
두 사람의 내면은 정 반대의 길을 걷는 셈입니다.

둘째로, 신앙이야말로 우리를 참된 길로 이끌어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 한다한 이들, 가진 자들, 많이 안다는 이들, 심지어는 거룩하다는 이들도 많지만,
결국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루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스스로 이 '신앙'을 길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무엇(돈, 명예, 권력)이 나를 키워주지 못하고,
거룩하다는 이가 가진 그 신앙이 나를 키워주지도 못합니다.
결국 '신앙'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조금씩 쌓여 나가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할 준비가 되었을까요?
오히려 신앙적인 무엇을 읽든, 무엇을 접하든 의심부터 하면서 "주님, 일단은 제 앞의 당면과제가 이것이니까요, 이것부터 해결하고 그 다음에..."라고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이미 우리 스스로의 반응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대전에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어 기도를 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다른 유혹거리를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예 기도시간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무엇 무엇에만 지독한 관심을 보이며 하느님은 마음 한 귀퉁이에 찌그러뜨려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대선이 코앞이네요,
후보자들이 어떤 토론을 했고 시국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세속의 징표는 읽으면서 하늘나라의 표징은 읽을 줄 모르는" 이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조건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나 자신의 변화에 있습니다.

서로 죽일듯이 싸우던 두 나라가 열강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잠시 전쟁을 멈추었다고 그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우리는 다시 싸울 준비가 이미 우리의 내면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의 이 '분열'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는
어딜 가든지 폭행과 분쟁이 있을 뿐입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그 평화가 이웃으로 향기처럼 번져나가는 것입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이,
믿음 안에서 색다른 시각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똑같은 인간사의 수레바퀴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그러지 않으면 필시 우리는 5년 뒤에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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